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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탈학교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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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4-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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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이 만난 세상]

겸/ 10대 탈학교생 queer_kid@hanmail.net

학교를 자퇴한 뒤 얻은 깨달음 중 하나는 학교를 가지 않는 시간에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학생인권운동, 청소년축제 기획, 북카페에서 책 읽기, 도서관 벤치에 누워 낮잠 자기, 시네마테크부산에서 비디오 보기, 음악감상실에서 죽치고 놀기 등은 부산에 살던 시절 학교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그렇지만 그런 ‘놀이’들은 10대를 한 인간으로 대우하고 삶과 배움에 대한 고민을 함께하는 스승을 대신하지는 못했다.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배움에 대한 욕구가 강하던 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무언가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도 대안학교라는 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탈학교생을 위한 대안적인 공간이라던 그곳은 ‘자율성’이라는 이름만 내건 채 커리큘럼이나 체계적인 학교 운영에 대한 진지한 논의 없이 진행된 시민단체의 ‘자위성’ 짙은 프로젝트였다. 대학생 봉사자가 교사로 채용되어 수업을 대학생 사회봉사 시간으로 뒤바꿔놓았고, 교사가 가르치는 과목의 전문가가 아닌 만큼 수업은 ‘페다고지’의 ‘페’도 모른 채, 교육에 대한 고민이 부재한 진부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 제도권 학교에 이어 비제도권 학교에서마저 교육에 배신을 당한 난 ‘더 이상 학교 따위에서 배움을 찾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과 함께 두 번째 자퇴를 했다. 이는 기실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와 함께 그 학교를 다녔던 한 친구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대안학교를 자퇴하고, 심지어 수능을 보고 들어간 대학에서마저 한 학기를 채우지 못하고 자퇴를 한 뒤 이젠 하자센터에서 공부할 것이라며 서울로 올라와 자취 중이다. 또는 입시 위주의 교육을 견디지 못하고 학교를 나온 대다수 나의 친구들은 교환학생으로 유학 중이거나 외국 대학의 진학을 위해 영어와 SAT(학습능력적성시험)를 준비하고 있다. 나는 이런 현상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공교육의 문제를 꼬집으면서 탈학교를 주장하는 이들은 탈학교 이후 아이들의 삶에 대한 성찰 없이 탈학교지상주의만 설파하기 때문이다.


서울에 올라온 뒤 대학교 수업을 청강하거나 대학생들과 함께 세미나를 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느낀 것은 탈학교생(비대학생)과 대학생이 겪고 있는 현실과 고민의 지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나는 몇개씩 밀린 레포트나 학점에 대한 고민 같은 걸 해본 적이 없다. 대학 내 이슈들을 토론하는 대학생들과 함께 있을 때면 소통과 교감의 어려움을 겪으며 탈학교생 공동체 같은 공간이 있어서 우리의 고민을 풀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2년 전 나는 월간지 <아웃사이더>에 ‘탈학교를 꿈꾸며’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꿈이었던 탈학교가 이제는 더 이상 꿈이 아니다. ‘사는 곳 어디나 학교’라는 말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공감하지만, 곧이 곧대로 믿을 만큼 순진하진 않다. 제도권 학교와 비제도권 학교, 대학생들 사이에서 나의 공간을 찾지 못하고 겉돌며 외로웠던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앞으로 탈학교들은 자신의 언어로 삶을 풀어낼 수 있는 환경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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