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의 역사이야기]
50 · 60년대 진보정당의 빛나던 활약과 비교하면 민주노동당의 성과는 소박하기 짝이 없다네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탄핵의 열풍 속에 치러진 2004년 4·15 총선에는 몇 가지 측면에서 보는 이들을 헷갈리게 하는 착시현상이 작용했다. 열린우리당은 과반수를 넘겨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고, 한나라당은 박근혜 대표의 새로운 지도력 덕에 목표치를 훨씬 넘겨 선전했다고 하고, 민주노동당은 44년 만에 진보정당의 의회 진출을 두 자릿수로 이루어내는 쾌거를 거두었다고 한다. 원내의 주요 3당이 모두 선거에서 나름의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인데, 그러면 망한 것은 민주당밖에는 없게 된다. 과연 이런 셈법은 정당할까?
지갑에 얼마 있었는지도 가물거리지만…
탄핵 직후의 여론조사를 보면 열린우리당이 최소 200석은 문제없는 것으로 보였는데 막상 뚜껑을 여니 150석을 살짝 넘겼다. 출구조사는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을 또 한번 흥분시켰다. 막판에 한나라당이 치고 올라와 제1당이 어려울지 모른다고 했는데, 출구조사 결과 방송 3사가 모두 잘하면 170석대의 압승을 거둘 것이라 했으니, 다시 한번 높아진 기대치 덕에 152석은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거 전 열린우리당의 의석 수가 50석이 채 안 된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열린우리당은 의석 수를 3배나 늘려 한나라당을 앞지르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1·2등 싸움 못지않게 3·4등의 다툼도 극적이었다. 단 한 석도 의석을 갖지 못했던 민주노동당은 50년 전통의 정통야당을 표방하면서 60석이 넘는 의석을 자랑하던 원내 제2당인 민주당을 앞질렀다. 민주당에게는 끔찍한 일이지만, 한국 정치사에서는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노동당이나 사실 탄핵이라는 특수 상황이 아니면 거두기 힘든 정치적 승리를 거두다보니 조금은 비본질적인 논쟁도 벌어졌다. 민주노동당의 새로운 스타로 부상한 노회찬 사무총장은 열린우리당의 지지도가 갑자기 높아진 것을 두고 ‘지갑을 주운 격’이라고 비꼬며, 지갑을 주웠으면 경찰에 가져다주라고 일침을 놓았다.
이에 열린우리당의 유시민 의원은 정작 지갑을 주운 것은 민주노동당이라고 반박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뒤늦게 참견을 해본다면 나는 유시민이 맞다기보다는 노회찬의 비유가 조금은 적절치 않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나는 열린우리당이 돈이 가득 든 지갑을 주웠다기보다는 노무현 대통령이 도박을 해서- 그것도 4년이나 임기가 남은 대통령직을 걸고- 엄청나게 큰 판을 땄고, 그 판돈을 열린우리당이 챙겼다고 보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은 중간에 돈통을 떨어뜨려 처음 생각만큼 많이 따지는 못했어도 그냥 지갑을 주운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면 민주노동당이 그냥 길 가다 남의 지갑을 주운 것일까?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잃어버린 지갑을, 그것도 그냥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강도당한 지갑을 오랜 노력 끝에 찾아낸 것이다. 하도 오래 전의 일이라 원래 지갑에 돈이 얼마나 들어 있었는지도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꽤 많은 현찰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따져보아야 한다. 그동안 화폐가치는 얼마나 떨어졌으며, 이 돈이 없어 얼마나 고생을 해야 했던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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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8번 노회찬의 극적인 당선이 더욱 큰 의미를 갖는 것은 그의 당선으로 김종필이 낙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4·19를 짓밟은 5·16 군사반란의 주역인 김종필은 하필이면 민주노동당의 노회찬에게 자리를 내주고 4월19일에 정계은퇴 성명을 내야 했다. 박정희, 전두환 등과 함께 군사독재 정권을 상징하는 김종필이 정계에서 활보한 43년의 세월은 우리의 정치에서 ‘노동’과 ‘진보’가 실종된 기간이었다. 단순한 실종이 아니라 그 세월은 퇴행의 시절이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민주노동당이 거둔 예상 밖의 승리에 감격해하지만, 혁신세력이 비슷한 성적을 거두었던 1960년의 7·29 총선을 그 당시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60년대 7 · 29 총선을 아시는가
미완의 4월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뒤 실시된 7·29 총선에서 혁신세력은 민의원 233석에서 5석, 참의원 58석에서 3석으로 모두 8석을 차지했다. 사회대중당은 민의원에서 4석을 차지하여 175석의 민주당과 큰 격차가 났지만 자유당을 제치고 원내 제2당이 되었다. 같은해 10월의 보궐선거에서는 한국사회당 위원장이던 전진한이 비록 무소속 간판으로 나섰지만 정치1번지 종로갑구에서 당당히 당선되기도 했다. 혁신세력의 8석은 모두 지역구에서 얻은 것으로, 당시에 지금과 같이 정당투표에 의한 비례대표제가 있었다면 혁신계는 지역구에서 두 석을 얻는 데 그친 현재의 민주노동당보다 더 많은 의석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혁신세력이 7·29 총선에서 예상 밖의 참패를 했다고 쓰고 있다. 지금 개혁·진보 세력은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약진하여 충실한 교두보를 마련했다고 꿈에 부푼 채, 어떤 상임위에서 어떻게 활동해야 할지 행복한 상상을 하기도 하고,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1960년 7월의 혁신세력은 지역구 8석의 성과를 거두고도 이를 전면적 패배나 참패로 받아들였고, 의회정치 과정에서 설 땅이 거의 없어졌기에 주된 활동을 의회투쟁에서 의회 밖의 장외투쟁으로 바꾸어야 했다.
이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혁신정당이 44년 전에 거둔 지역구 8석은 지금과 같이 민주노동당이 자랑하는 수만명의 진성당원도 없이 이루어졌다. 이들 혁신정당보다 훨씬 더 조직적으로 튼튼하던 진보당의 당원도 기천명 수준이었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뿐 아니라 전농이나 전국빈민연합의 조직적 지원을 받았지만, 1960년 7·29 총선 당시에는 이런 대중조직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민주노동당은 적어도 1997년의 국민승리21 이래의 경험이 축적됐고, 특히 2000년 총선의 쓰라린 경험 속에서 “전투를 앞두고 분열은 안 된다”라는 뼈아픈 학습효과를 당원들이 공유하여 진성당원들이 자신들의 후보를 직접 선출하고 일치단결하여 선거에 임했다.
그러나 1960년의 혁신정당에는 이런 기운을 찾아보기 힘들다. 우선 혁신세력 자체가 사분오열되어 당선자를 낸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이외에도 혁신동지총연맹, 독립노농당, 민주혁신당 등 각종 단체가 선거에 참여하여 혁신계가 입후보한 123개 지역 중 5분의 1에 해당하는 23개 지역구에서 자기들끼리 경쟁해야 했다. 당시의 혁신정당 중 가장 규모가 큰 사회대중당의 경우 부산 동래구에만 4명의 후보자를 낸 것을 비롯해 모두 5곳에서 2명 이상의 후보가 같은 당 간판 아래 출마- 당연히 모두 낙선- 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민주노동당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한 인터넷이나 TV토론은 1960년에는 물론 있지도 않았다. 당의 구심 역할을 해줄 지도자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1960년의 7·29 총선에서 혁신세력이 거둔 성과에는 과장된 측면도 있다. 특히 참의원 선거에서 거둔 3개의 의석은 혁신세력의 정책이나 선거전략의 승리라기보다는 ‘기호’의 승리였다. 당시 혁신세력은 얼마 안 되는 조직과 인적 자원을 민의원 선거에 집중시켰고, 참의원 선거에는 큰 역량을 기울일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효자 노릇을 한 것은 기호 추첨에서의 운이었다. 당시 새로이 도입된 참의원 선거에서 전국 10개의 선거구 중 기호 1번의 후보는 서울을 제외하고는 모두 당선되고 기호 2번은 6명이 당선됐는데, 혁신정당 출신이 경남과 경북에서는 1번을 뽑았고 충남에서는 2번을 뽑아 이들 3명이 모두 당선된 것이다. 경북과 경남에서 당선된 사람이 각각 8명을 뽑는 광역 선거구에서 8등과 7등을 한 것에서 기호의 덕을 톡톡히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조봉암을 배제한 현 민주당의 뿌리
2004년의 4·15 총선에서 색깔론 시비 때문에 직접적인 표적이 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민주노동당보다는 열린우리당이었기에, 민주노동당은 1960년 혁신세력이 당한 것처럼 노골적인 색깔 공세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당시 검찰은 선거를 20여일 앞둔 상황에서 “혁신계 정당원의 60% 이상이 과거 남로당원이며, 이런 구성 비율은 증가 추세”라며 혁신정당들의 구성원과 활동을 전국적으로 조사하라고 경찰에 지시하기까지 했다.
조봉암이 살아 있던 1950년대에는 진보세력이 더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1952년 2대 대통령 선거에서 혈혈단신 출마한 조봉암은 민주노동당이 이번 선거에서 거둔 정당득표율 13%에 조금 못 미치는 11%대의 지지를 얻어 2위를 차지했다. 이때 보수야당의 조병옥은 같은 당의 이시영이 출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승만이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켜 자신의 동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직후임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을 견제하기 위해 이승만을 적극 지지했다. 당시 조병옥이 “조봉암씨에게 자리를 맡길 것이라면 차라리 김일성과 타협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을 볼 때 그를 비롯한 보수야당 지도자들에게 조봉암은 김일성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었다.
사실 조봉암은 처음부터 진보정당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승만의 독재를 효과적으로 종식하기 위해서는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통합 야당을 출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수야당 지도자들은 1952년 선거에서 상당한 가능성을 보인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운동의 거물 조봉암과 손잡는 것을 거부했다. 1955년 1월 범야권의 신당이 추진될 때 보수파는 신당조직촉진위원회가 준비한 발기취지문에 “수탈 없는 국민경제 체제”란 표현이 들어간 것을 문제 삼았다. 당시 보수파들이 소속된 민국당의 강령이 “중요한 기본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관리”를 말하고 “노동대중 본위의 사회 입법”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도 이런 표현을 문제 삼은 것은 조봉암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죽하면 <조선일보>조차 “수탈과 피수탈이 없는 균등한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헌법이 명시한 국가이상”이라면서 평등은 “새삼스레 논쟁할 필요 없는 자명한 이치”라고 보수파들을 비판했을까?
신당추진운동은 조봉암을 포함한 신당을 추진하는 ‘민주대동파’와 그를 배제하려는 이른바 ‘자유민주파’로 갈라졌다. 일제강점기부터 한민당 시절을 거치면서 보수파 내에서 막강한 지분을 갖고 있던 김성수는 그래도 신당이 조봉암을 껴안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55년 2월 그가 병사하자, 보수파들은 다시 완강히 조봉암을 거부했다. 공산주의자였던 사람은 비록 전향자라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2004년 선거에서 몰락한 민주당이 입만 열면 찾는 50년 전통의 정통야당의 연원인 1955년의 민주당은 이렇게 조봉암을 배제한 채 극우정당으로 출발했다. 박정희 때 통일원 장관을 지낸 신도성의 표현에 의하면 당시 ‘자유민주파’가 강조한 자유란 수탈의 자유, 부패할 자유, 양심적인 애국자를 반역자로 몰아 때려잡을 자유일 뿐이었다.
1956년의 3대 대통령 선거는 조봉암과 진보정치의 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선거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신익희가 선거를 불과 열흘 앞두고 갑자기 사망하는 돌발 상황 속에서 치러졌다. 여기서 조봉암은 216만표를 얻었는데, 신익희 추모의 성격이 강한 무효표를 포함할 경우 22%, 유효표만을 계산할 경우 30%의 지지를 얻었다. 그런데 당시 실제 선거에서는 조봉암이 이승만을 눌렀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엄청난 부정개표 때문에 선거결과가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자유당 정권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낸 홍진기의 전기에 따르면 대통령 선거의 개표는 자유당과 민주당의 참관만으로 진행됐는데, 조봉암의 표가 의외로 많이 나오자, 민주당은 부통령 선거의 개표를 공정하게 한다는 약속을 받아내고는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참관인을 모두 철수했다는 것이다. 이에 조봉암은 “투표에는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한 평론가는 “조봉암씨는 낙선된 것으로 발표됐다”라고 썼다.
조봉암은 낙선된 것으로 “발표됐다”
이때 조봉암이 얻은 표에 신익희에게 갈 표가 얼마나 섞여 있는가는 오랜 논쟁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당시 보수야당이 조봉암에게 보인 극도의 혐오감과 행동을 보면 신익희의 죽음 때문에 보수야당에 갈 표가 조봉암에게 간 것 같지는 않다. 신익희의 죽음이 워낙 갑작스러운 것이었기에 투표지에는 신익희의 이름이 그대로 인쇄됐고, 민주당은 “용공적 노선을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에 대해서는 한 표라도 고 신익희씨를 지지하던 유권자가 투표하는 것을 희망하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공공연히 표명했다.
조병옥은 신익희의 죽음 이후 민주당이 사회주의적 경향을 가진 조봉암 대신 “그래도 반공의 지도자”라고 해서 이승만에게 투표하도록 하여 이승만의 당선을 도왔다고 회고했다. 이런 민주당이었기에 민주당은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강력한 경쟁자가 될 조봉암을 이승만이 진보당 사건을 일으켜 제거할 때 침묵했던 것이다.
2004년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정말 소중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한국전쟁과 100만의 민간인학살로 우리 정치가 망가질 대로 망가진 1952년과 1956년에 조봉암이 거둔 성과를, 그리고 1960년 4월혁명 직후의 7·29 총선에서 급조되고 분열된 혁신세력이 거둔 성과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정식으로 결성된 정당이 아니라 추진위원회 단계의 진보당이 내세운 조봉암이 대통령 선거에서 유효투표의 30%를 획득할 만큼 1950년대에는 진보의 토양이 존재했다. 지금은 대구·경북이 수구와 지역주의의 아성인 것으로 비쳤지지만, 그 당시에는 조봉암이 부정 개표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꺾은 25개 선거구(전국 181개 선거구)에서 절반인 11개 구가 경북지역에 있었고, 4월혁명의 도화선이 된 2·28이나 3·15 시위도 모두 영남지역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4월혁명 이후에 만들어진 피학살자 유족회도 대부분 이 지역에 집중돼 있었다. 이것이 박정희 일당의 군사반란이 있기 이전 한국 정치의 분위기이고 영남의 분위기였다.
전쟁과 학살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진보정치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토양이 존재했던 까닭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나는 1940년대 후반에 몸으로 느낀 자유와 해방의 기억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중한 기억은 적어도 4월혁명까지는 살아 있었다. 그 기억은 반란범 박정희 일당의 군사독재가 시작되면서 서서히 사라졌다. 지금의 50대 중반까지는 모두 박정희 치하에서 학교를 다닌 세대이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대통령은 박정희뿐이었고, 다른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이승만의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처형이 진보정치를 죽인 것이었다면, 박정희의 군사독재는 진보정치를 꿈꿀 능력마저 죽여버린 악마의 시대였다.
한국의 진보정치는 힘들게 여기까지 왔다. 언론도 그렇고 당원들도 그렇고, 민주노동당이 4·15 총선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둔 것처럼 흥분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이 할퀴고 간 50년대나 4월혁명 직후와 비교해볼 때, 탄핵이라는 ‘우연’한 결과로 얻어진 그 ‘엄청난 성과’는 소박하기 짝이 없다. 50년대나 60년대 초반의 혁신세력이 보수와 진보로 대별되는 진짜 진보라기보다는 전쟁과 학살에서 살아남은 양심적인 민족주의자들의 집합체라면, 오늘의 진보세력은 그들마저 사라진 척박한 토양에서 정말 새롭게 떠오른 존재이다.
아직도 배가 고프다, 몹시 고프다
그러나 수구냉전 세력은 지금 비록 위축됐다고는 하나 부자 망해도 3대는 간다고 아직도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지면이 다하여 충분히 논할 수는 없지만, 민주노동당의 약진이 반가우면서도 여러 가지 면에서 정말 잘 해낼 수 있을지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조봉암을 내치고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몬 과거의 민주당보다는 훨씬 열려 있는 열린우리당과의 관계를 현명하게 푸는 일은, 민주노동당이 진보적 대중정당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냉전수구 세력의 퇴출보다 더 진보적인 과제는 지금 이 순간 존재하지 않는다. 30년 넘는 군사독재에 이어 아직도 박정희 없는 박정희 시대를 청산하지 못한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이 거둔 엄청나면서도 ‘초라한’ 성과는 우리가 그 시대에 얼마나 뒷걸음질했는가를 새삼 느끼게 한다. 40여년 만의 원내 진출이라는 엄청난 식탁을 보면서도 처참했던 50년대에 우리가 서 있던 지점을 생각하면 난 아직도 배가 고프다. 몹시 고프다.
지갑에 얼마 있었는지도 가물거리지만…

이승만에 의해 제거된 조봉암(맨 위)과 공판정에 선 그의 모습(위 맨 왼쪽). 그는 이승만과의 대통령 선거에서 유효득표 30%를 얻은 것으로 발표됐지만, 부정선거만 없었다면 그가 이겼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원내진출에 실패했던 민중당의 1990년 12월 현판식.(사진/ 한겨레)

2004년 4월 당선 확정 직후 환호하는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 화려했던 과거에 비하면 박정희 집권 이후 진보정당은 너무 고생을 했고 지금의 성과도 ‘초라하기만’하다.(사진/ 한겨레 이정용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