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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그 예술가, 애교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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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4-2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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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무구한 교태와 열정으로 씨니컬한 화단을 날로 먹으려는 낸시랭

김경/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예술가 그룹만큼 ‘포즈’가 중요한 사람들도 없다. 심지어 ‘포즈’나 ‘제스처’만으로도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전혜린이 그 대표적 케이스다. 이렇다 할 텍스트는 없지만, 1950년대 상처와 폐허의 시대에 트렌치 코트 깃을 올려세우고, ‘자유’라는 말을 상용하며, 명동에 나와 술을 마셨던 그 멜랑콜리한 실존주의적 포즈만으로 예술가가 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일찍 자살까지 해버렸으니, ‘텍스트의 부재’라는 약점은 오히려 강점이 되어 전설로 포장된다.

특히 현대 미술로 성공하려면 어느 정도 냉담한 포즈를 취해야 한다. 눈에 띄는 기이한 이미지를 만들어놓고는 막상 인터뷰할 때는 입을 다물고 사람들을 피해다녔던 앤디 워홀이나 전시장 안에 남성용 소변기를 뜯어다놓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태연히 체스만 두었던 마르셀 뒤샹처럼 말이다. 특히 뒤샹 이후 예술을 부정하는 듯한 허무적인 제스처는 현대 미술인들의 기본 사양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아주 특이한 부류의 아티스트를 만났다. 낸시랭이라는 20대 여성 작가인데, 그녀는 내가 만난 어떤 부류의 미술인들과도 달랐다. 일단 그 옷차림만 보자면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요란해서, 그녀가 자신을 아티스트라고 소개할 때는 무척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시니컬’하기는커녕 지나칠 정도로 애교스러웠다. 그 ‘애교’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헤벌쭉 늘어졌다.

낸시에게 세상에는 네 가지 부류의 사람들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빠, 언니, 선생님 그리고 교수님. 누구든 만나면 팔짱부터 끼고 자신이 직접 제조한 폭탄주를 마시게 하는데, 술을 마시는 동안 남자든 여자든 ‘낸시의 애교 퍼레이드’에서 시선을 놓을 수 없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건배 구호로 “큐티(Cutely), 섹시(Sexy), 키티(kitty), 낸시(Nancy)!”를 외치게 한 뒤 자신은 구호가 끝나면 교태스러운 고양이 소리로 화답했다.

낸시에겐 여성 작가 특유의 자의식이라든가 유식한 여자 특유의 교양 같은 게 없어 보였다. 심지어 어느 대학에 출강까지 한다는 그녀는 대책없이 무식까지 했다. 누군가 “내 생일이 하필 4·19”라고 하자, 낸시는 “4·19가 무슨 날이야?” 하고 묻고는 “생일이면 나이트클럽에 가서 파티를 하자”며 사람들을 졸랐다. 낸시는 여성이라든가 예술가 또는 지식인이라든가 한국인이라는 굴레에서 완전히 초월한 존재처럼 보였다. 대신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받아들이려는 순진한 열정으로 불탔고, 모든 형태의 문화와 사람들을 찬미할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낸시랭은 초대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가서 섹시한 퍼포먼스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거리 한복판에서 내가 좋아하는 빅토리아 시크릿 란제리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바이올린을 켰어요. 어렸을 때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었는데, 그 이루지 못한 꿈을 미술가로서 초대받지도 않은 자리에 가서 이루니까 무척 신났어요.”

낸시의 목표는 세상을 날로 먹는 거다. 세상이 그리 만만할 리 없지만, 낸시의 순진무구한 ‘애교’ 앞에서는 모든 게 속수무책처럼 보였다. 게다가 낸시에게는 아티스트로서 흥미로운 텍스트가 있다. 로코코 시대 이후, 많은 지적인 여자들이 그저 숨기는 데만 급급했던 (적어도 낮 동안에는) ‘애교’라는 무기가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화단에서 어떤 힘을 발휘할지 나는 두고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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