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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출판- 무섭게, 뜨겁게, 초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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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4-01 00:00 수정 : 2008-09-17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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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이를 견딜 수 없게 만든 김형경의 새 소설 <성에>… 죽음을 초대하는 사랑의 환상이여

권혁란/ <이프> 전 편집장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주게, 사리꼴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사철 님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몇해 전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읽다 말고 기어이 음반가게로 달려갔다. 주인공이 그놈의 ‘정선아리랑’을 들을 때마다 덩달아 마음이 울렁거려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김형경은 <성에>(푸른숲 펴냄)를 내놓으면서 시조의 아름다움을 새삼 발견한 듯 사이사이에 낯선 시조를 집어넣었고 나도 새삼 시조를 처음 본 듯 끌려들어갔다.

‘사람이 사람 그려 사람 하나 죽게 됐네. 사람이 사람이면 설마 사람 죽게 하랴. 사람아 사람을 살려라 사람이 살게’ 같은 시조가 뿜어내는 정조는 요샛말로 ‘오버’랄 수 있겠지만 주인공들의 내심이나 주제와 상관없이 밑줄을 긋게 하는 힘이 있었다.

참 한심하다 싶을 만큼 아직도 나는 사랑에 대한 환상이 있다. 누군가가 나를 한량없이 넓은 마음으로 사랑해주기를, 그저 따스하기만 하기를, 다정하기만 하기를, 절대 눈을 부라리며 따지지 않기를, 소리 지르지 않기를, 살면서 행하는 모든 실수와 모순을 그저 헛웃음으로 웃어넘기고 지켜보아주기를, 바쁘게 걸어가는 내 발목을 잡아채지 않기를…. 그렇게 어쩌면 세상에 없는 사랑을 누가 내게 퍼부어주었으면 하고, 아직도 꿈꾸고 있는 중이다.


<성에>는 주인공 연희의 말마따나 사는 것에서나 사랑에서나 ‘환상’을 깨지 못한, 아니 깨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을 불러오면서까지 제 나름의 사랑과 환상을 추구하면서 부르는 서글픈 절창이다. 가슴에 빈 방 하나 깨끗이 치워놓고 언젠가 올지도 모를 사람을 기다리는 붙박힌 채 살아가는 나무 같은 이야기다. 제 삶 하나 어쩌지 못해 갈팡질팡하다가, 지나가다 찾아온 손님 같은 사랑에게 엉뚱한 제 마음을 주어놓고 환상을 이루기는커녕 질투와 소유욕으로 결국 다 죽게 만들어버리는 바보 같은 이야기다. 아름답기는 고사하고 너무 무서워 열두번도 넘게 머리칼을 곤두서게 만든다.

산골 오지에서 세계일주를 꿈꾸는 가련한 몽상가인 ‘남자’와 세상에 없는 ‘스위트 홈’을 꿈꾸는 ‘사내’와 도시에서 살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와 자연처럼 살기를 원한 ‘여자’가 폭설로 고립된 집에서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다가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 되기까지…. 감히 굳어버린 세상의 질서를 새로 써보고자 한 그들의 아슬아슬하게 엇갈리는 마음의 행로를 그 집 앞 참나무와 박새와 청설모와 바람의 시선으로 전해주는 방식은 내겐 공포영화를 보는 일과 다름없었다. 왜, 어쩌다 이 이야기 속으로 내가 들어왔을까. 후회와 궁금증이 바닥부터 치고 올라와 무섭고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우연한 방문자로 그들의 죽음을 목도한 연희와 세중이 세 구의 주검을 앞에 두고 죽음보다 어두운 섹스의 광기 속으로 빠져들 때는 내내 내 몸도 괴이쩍은 열기로 뜨거워졌다. 죽음과 공포와 사랑과 성행위가 한 두릅에 엮여 있다는 걸 보여주려 했다면 이 소설은 나한테만큼은 성공이다. 사랑과 섹스에 대한 환상을 깨지 못한 채 일상의 너저분한 주변을 얼쩡거리던 한 여자의 마음속을 헤집고 갈라내 끄집어내어 백일하에 드러나게 만들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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