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작가들의 다양한 실험 벽화 '월 워크 Ⅱ'전… 판화 · 사진의 '에디션 개념' 도입해 복제 가능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설치 작가 서혜영씨는 일상에서 물리적 경계의 표시로 쓰이는 흔하디 흔한 ‘벽돌’(Brick)을 작업의 모티브로 삼고 있다. 한층 한층 올라가 닫힌 공간을 만드는 벽돌이 그에겐 안과 밖을 이어주는 시각적 통로 구실을 한다. 입체적인 벽돌을 그대로 쓰지 않고 테이핑 기법에 따라 선을 면과 공간으로 팽창시켜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가 작업하는 테이핑 선은 마치 사이버 공간과 현실 세계를 넘나드는 듯한 시공간 초월을 실감케 한다. 그렇게 그는 무형의 공간에 테이프를 붙여 생명력을 부여하는 신비로운 설치 작업을 하고 있다.
시한부 테이핑 작품이 생명을 연장하다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보였던 것들이 그의 손을 거치면 예사롭지 않은 작품으로 탄생했다. 하지만 그는 전시가 끝난 뒤의 씁쓸함을 ‘천형’처럼 받아들여야 했다. 돌이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작품의 최후’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아무리 숨쉬며 열려진 벽면을 만드는 예술적 도구로 쓰인 테이프라 할지라도 접착력의 시효는 있게 마련. 대부분의 작품은 전시가 끝나면 폐기 처분되는 신세를 면하기 힘들었다. 만일 테이핑 기법을 이용한 작품을 외벽에 그대로 방치하면 빨간색 테이프가 분홍색이 되고, 반듯한 직선이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바뀌기 일쑤였다. 이제 그의 작품은 영원한 생명력을 보장받게 됐다. 원근법적 교란을 유도하며 시공간을 유영하는 그의 테이핑 기법이 회화 매체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그는 최근 오랫동안 작품에 생명력으로 부여하는 방법으로 머릿속에 간직했던 기법을 전시에 적용하는 데 성공했다. 오는 4월24일까지 서울 강남구 청담동 카이스갤러리(02-511-0668)에서 열리는 ‘월 워크(Wall Works) Ⅱ’전에 선보인 〈New Romancer〉(공상가) 역시 벽돌의 이미지를 기호화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작품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그가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는 테이프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그가 테이핑 기법을 포기한 것일까. 그의 작품에 테이프가 보이지 않을지라도 테이핑 기법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테이프를 사용한 뒤 이내 떼냈을 뿐이다. 그동안의 작품에서는 기하학적 도형이 테이프 두께만큼 튀어나온 데 비해 〈New Romancer〉에서는 그만큼 함몰돼 있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에 그는 아이디어만 제공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컴퓨터에 담은 작품의 이미지를 만든 뒤, 제작에 관련된 설명서를 갤러리에 제공하고 정교한 테이핑 작업을 잠시 거들었을 뿐이다. 테이핑 기법이 그의 손을 벗어나 영구적 매체로 거듭나는 과정은 단순했다. 일단 기하학적 벽돌 이미지를 만든 뒤 슬라이드 필름에 담았다. 그 다음에 슬라이드 필름을 벽면에 투사해 주문 제작한 붉은색의 라텍스 페인트로 대략 선을 그은 뒤, 예전처럼 테이핑 작업을 했다. 그리고 원래 벽면 색깔의 페인트를 공기압축기로 뿌리고 테이프를 떼냈다. 페인트 작업은 작가의 의도에 맞게 인테리어 전문 도색 기술자들이 처리했고, 테이핑 작업은 훈련을 받은 미대생들이 대신했다. 이렇게 업그레이드된 그의 테이핑 기법은 생명력 있는 작품으로 거듭났다.
‘월 워크(Wall Works) Ⅱ’전에 소개된 8개의 작품은 모두 서혜영씨의 경우처럼 작가가 직접 제작하지 않는 공정을 거쳐 태어났다. 성낙희씨의 <점>(Dot)은 종이 위에 번지는 잉크의 우연한 효과를 재현한 작품이다. <점> 역시 작가의 디자인 아이디어를 필름에 담은 뒤, 슬라이드를 투사해 페인트로 채색했다. 세 유형의 디자인을 빨강·군청·녹색·진분홍색 네 색깔로 색칠할 수 있기에 <점>은 모두 12가지 형태의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다. 고낙범씨의 〈Picturesque-still, life〉(그림 같은-정물)는 폴 세잔의 정물화에 등장한 33가지 색채를 분석해, 쓰인 정도에 걸맞은 두께로 기다란 스트라이프로 배치했다. 스트라이프 중앙에는 33가지 색깔로 그린 정물화 한점을 걸어놨다.
이렇게 작가의 아이디어를 작업자들이 재현한 작품들은 전시장을 벗어나 공공건물이나 주택, 휴게소를 예술이 있는 공간으로 바꿔놓을 예정이다. 모더니즘 시대까지 인간의 삶에 밀접하게 연결된 예술로 자리잡았던 벽화가 현대화된 예술로 변신하는 것이다. 그것도 사진이나 판화처럼 ‘에디션’(edition) 개념이 적용돼 벽화가 살아서 움직이게 된다. 카이스갤러리 이순령 큐레이터는 “기존의 벽화는 하나의 완성품으로서 이동이 불가능했다. 이번에 전시한 작품들은 일상의 공간이 예술과 손쉽게 결합할 수 있도록 에디션 개념을 적용했다. 작가는 아이디어를 제공해 작품으로 인정받게 된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뤄졌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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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가 곧 작품”… 작가와 작업자가 달라
그동안 강남의 상업적인 갤러리는 ‘흥행’ 성공이 보장된 작가들의 낯익은 작품들을 ‘재활용’하는데 익숙했다. 지명도가 낮은 작가로서는 높은 문턱에 올라서기가 쉽지 않았고, 전시기획자로서도 새로운 시도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이런 실정에서 해외 작가들의 벽화 작품을 소개한 지난해의 ‘월 워크 Ⅰ’전에 이어 국내 작가들에게 새로운 작품 활동의 모티브를 제공한 것은 평가받을 만하다. 초보 관객일지라도 전시 작품들을 살펴보며, 그것들이 자신의 공간을 채울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액자에 걸린 작품이 보이지 않는다(고낙범씨의 정물화 한점이 있긴 하지만)며 “작품은 어디 있수?”라고 묻지 않는 것은 기본이다.

테이핑 기법을 이용한 서혜영의 월 드로잉 작품 〈New Romancer〉. 작가의 의도에 따라 미술학도들이 실제 작업을 하고 있다.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보였던 것들이 그의 손을 거치면 예사롭지 않은 작품으로 탄생했다. 하지만 그는 전시가 끝난 뒤의 씁쓸함을 ‘천형’처럼 받아들여야 했다. 돌이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작품의 최후’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아무리 숨쉬며 열려진 벽면을 만드는 예술적 도구로 쓰인 테이프라 할지라도 접착력의 시효는 있게 마련. 대부분의 작품은 전시가 끝나면 폐기 처분되는 신세를 면하기 힘들었다. 만일 테이핑 기법을 이용한 작품을 외벽에 그대로 방치하면 빨간색 테이프가 분홍색이 되고, 반듯한 직선이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바뀌기 일쑤였다. 이제 그의 작품은 영원한 생명력을 보장받게 됐다. 원근법적 교란을 유도하며 시공간을 유영하는 그의 테이핑 기법이 회화 매체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그는 최근 오랫동안 작품에 생명력으로 부여하는 방법으로 머릿속에 간직했던 기법을 전시에 적용하는 데 성공했다. 오는 4월24일까지 서울 강남구 청담동 카이스갤러리(02-511-0668)에서 열리는 ‘월 워크(Wall Works) Ⅱ’전에 선보인 〈New Romancer〉(공상가) 역시 벽돌의 이미지를 기호화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작품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그가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는 테이프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그가 테이핑 기법을 포기한 것일까. 그의 작품에 테이프가 보이지 않을지라도 테이핑 기법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테이프를 사용한 뒤 이내 떼냈을 뿐이다. 그동안의 작품에서는 기하학적 도형이 테이프 두께만큼 튀어나온 데 비해 〈New Romancer〉에서는 그만큼 함몰돼 있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에 그는 아이디어만 제공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컴퓨터에 담은 작품의 이미지를 만든 뒤, 제작에 관련된 설명서를 갤러리에 제공하고 정교한 테이핑 작업을 잠시 거들었을 뿐이다. 테이핑 기법이 그의 손을 벗어나 영구적 매체로 거듭나는 과정은 단순했다. 일단 기하학적 벽돌 이미지를 만든 뒤 슬라이드 필름에 담았다. 그 다음에 슬라이드 필름을 벽면에 투사해 주문 제작한 붉은색의 라텍스 페인트로 대략 선을 그은 뒤, 예전처럼 테이핑 작업을 했다. 그리고 원래 벽면 색깔의 페인트를 공기압축기로 뿌리고 테이프를 떼냈다. 페인트 작업은 작가의 의도에 맞게 인테리어 전문 도색 기술자들이 처리했고, 테이핑 작업은 훈련을 받은 미대생들이 대신했다. 이렇게 업그레이드된 그의 테이핑 기법은 생명력 있는 작품으로 거듭났다.

벽면에 슬라이드를 투사해 페인트로 채색한 성낙희의 <점>(Dot). 이 작품은 12가지 이미지로 실내 공간에 옮길 수 있다.(사진/ 박승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