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혁명'
등록 : 2000-11-21 00:00 수정 :
“시네마테크는 젊은 감독들의 가장 훌륭한 학교였다. 그곳은 영화의 성전(聖殿)이었다.”(장 르누아르)
프랑스 파리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자신의 영화인생에 끼친 영향을 열렬히 설명한 영화감독은 한두명이 아니다. 누벨바그를 탄생시킨 고다르와 트뤼포에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알랭 레네, 니콜라스 레이, 그리고 젊은 감독 레오 카락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감독들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그 설립자인 앙리 랑글루아에게 자신의 명성을 고스란히 바쳤다.
한 젊은 영화광에 의해 1936년 만들어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20세기에서 가장 거대한 작가의 산실이자 가장 전위적인 영화운동의 발원지가 돼왔다. 불과 22살의 나이에 ‘영화 필름의 보존과 상영’이라는 목적으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설립한 앙리 랑글루아는 죽을 때까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수집활동을 통해 6만여편의 영화로 이 공간을 채웠다. 그러나 앙리 랑글루아가 시네마테크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받는 이유가 단지 방대한 자료수집에 있는 것은 아니다. 랑글루아 이전에도 이미 스웨덴이나 영국에 영화자료관이 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보관의 기능만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랑글루아는 일주일에 10여편씩 자신이 직접 짠 프로그램을 상영하며 관객을 토론의 장으로 끌어냈다.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버려진 보석이 재발견되기도 했고, 시네마테크의 젊은이들은 누벨바그와 작가주의라는 영화적 사고의 혁명적인 전환을 만들어냈다. 또한 2차대전 때 폭격으로 파괴되었던 장 르누아르의 명작 <게임의 법칙> 같은 작품들이 시네마테크에 의해 복원되기도 했다.
시네마테크와 랑글루아가 영화인들로부터 받은 전폭적인 지지는 68년 대규모 거리시위를 촉발시킨 랑글루아 해임사건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드골 정부의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가 랑글루아를 관장 자리에서 해임시키자 르누아르, 레네, 고다르 등이 주축이 된 복권위원회가 만들어져 즉각적인 항의성명을 냈다. 영화계의 거성들이 거리로 직접 뛰쳐나와 서명운동을 벌였고 학생들은 항의농성을 했으며 찰리 채플린, 존 포드, 오슨 웰스 등 100여명의 국제적인 감독들도 자신들의 영화상영을 프랑스 안에서 금지하겠다는 서한을 보냄으로써 프랑스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결국 70여일의 투쟁은 랑글루아의 복권으로 마무리됐지만 이 사태는 68년 5월 학생운동의 전조로 해석되기도 한다.
60년이 넘은 역사를 가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여전히 영화광들에게 신선한 프로그램들을 제공하고 있다. 영화 상영 외에도 1년에 2차례씩 학술회의를 열고, <시네마테크>라는 계간지를 발행하며 미래의 작가들을 위한 어린이 영화교실도 운영된다. 최근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정부의 영화관련기관 통합계획과 마찰을 일으키며 약간의 진통을 겪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진통조차 영화의 전통을 지키려는 민간인들과 정부쪽의 공통된 의지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프랑스사회는 여전히 행복한 영화선진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