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 10대 탈학교생
평론가 수전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 중 ‘캠프에 관한 단상’에서 “세상에는 이름이 붙여지지 않는 것이 많이 있다. 그리고, 이름이 붙여지긴 했지만 설명되지 않는 것도 많이 있다”며 ‘캠프’라 불리는 감수성을 설명했다. 그로테스크한 탐미주의인 캠프로 잘 알려진 오스카 와일드 혹은 영화 <헤드윅>은 이름이 붙여질 수 없거나 붙여지긴 했지만 설명될 수 없는 인물이다.
문득 나는 지금껏 내게 붙여진 이름들이 붙여졌으나 설명되지 않는 것 또는 붙여질 수 없지만 붙여진 것이라 생각한다. 2년 전 <공산주의 선언>을 끼고 다닐 때 나의 영문 이름은 ‘맑스’였고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현재 나의 이름에는 성이 없다. 빅토리아라는 영국의 여왕이 호명될 때 그 이름은 한 시대를 내포한다. 특정한 이름은 정치 사상적인 의의와 시대적 분위기를 뜻한다.
내게 붙여진 10대, 동성애자, 탈학교생이라는 수식어는 정체성의 포지션과 기존 세대에 대한 저항을 뜻한다. 나의 이름에 사람들은 극단적인 반응을 보인다. 대단한 양 우러러보는 시선 혹은 세상에 덜 박힌 못 같은 존재. 나는 내게 붙여진 이름이 부담스러웠지만 자랑스러웠고 이름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붙여질 수 없는 이름에 붙여진 이름은 설명될 수 없을 뿐더러 오독되기 시작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동일한 존재일 수 없듯이, 동일한 이름을 가진 집단이라 할지라도 그들과 난 같을 수 없는 법이다. 하물며 맑스라는 닉네임을 지녔던 2년 전과 지금의 나는 다를 수밖에 없다.
‘겸이 만난 세상’이라는 지면을 통해 만날 독자들과 지난 이름들로 대면하고 싶지 않았다. 난 나의 담당 편집자에게 10대 탈학교생이라는 이름만은 쓰고 싶지 않다고 간곡히 말했다. 그러나 편집자는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이름이어야 한다고 답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초면에 내가 누구인지 되도록 짧고 간결하게 설명하도록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편집자의 대답은 이성적인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근대적 언어의 이름을 뜻했다. 나는 다시 한번, 하루가 다르게 세상은 변화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매우 천천히 변화하고 있음을 통감했다. 그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나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탈경계니 하는 지금이나 똑같았다.
어느 사이트에서는 헤드윅의 성정체성이 동성애자냐 이성애자냐 트랜스젠더냐는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그 논쟁은 무의미했다. 헤드윅은 그의 존재에 이름이 붙여지는 순간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다. 헤드윅은 현대라는 울타리의 외부에 존재한다. 즉, 그는 외계인이고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탸R?’(외계어)인 것이다. 기실 제대로 된 이름이란 권력을 가진 자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외국인’ 노동자라는 모호한 이름을 들을 때마다 난 그들이 서 있는 자리가 과연 어디인가에 대해, 또는 세상에 이름이 붙여지지 않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더불어 기존의 언어로 쓰인 나의 이름들이 불릴 때마다 그 몫을 찾지 못한 이름들에 몫을 찾아주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