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즈’(Dazz)로 거리에 흥겨움의 단비를 내려주는 무서운 신생밴드 '아소토 유니언'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 김수현 기자 groove@hani.co.kr
꽃샘추위가 맹추위로 돌변하던 3월13일,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학교에선 “진짜 뮤지션을 뽑아보자”는 자리가 마련됐다. ‘한국의 그래미’라는 야심찬 포부를 내세우며 제1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엔 지난해 말 1집 음반을 내놓고도 무려 4개 부문(올해의 음반·가수(그룹)·신인·아르앤비&발라드) 후보로 오른 무서운 신생 밴드가 있었다. 빅마마·러브홀릭·델리스파이스 등 쟁쟁한 음악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지만 아쉽게도 하나도 상을 건지지 못했다. 심사위원들도 너무했다 싶었는지 또는 섭섭했는지, 아차상 격인 ‘선정위원회 특별상’을 이들에게 돌렸다. 음향이 제대로 받쳐주지 않는 허술한 무대 위에서도 신나는 라이브 연주를 선보인 이들은 상을 받은 기쁨으로 손을 번쩍 추켜올리고 난 뒤 무대에서 표표히 사라졌다.
이태원 · 홍대 앞 거리에서 싹을 틔우다
‘아소토유니온’. 이들은 기존의 주류·비주류 뮤지션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음악적 토양을 다져온 밴드다. “탑골공원 할아버지들이 정말 우리나라 멋쟁이”라며 ‘여유 충만한 스타일’에 대한 경의의 뜻으로 ‘할아버지 중절모’를 애용하는 김반장(29·본명 유상철)은 특이하게도 드럼을 치면서 노래를 한다. 건반을 맡은 임지훈(32)은 흑인음악의 느긋함을 대변하는 레게파마 머리를 하고 있지만, 이성과 논리로 점철된 비판적 발언을 주저하지 않는다. 포크소년처럼 맑은 눈을 깜빡이며 온화한 미소만을 던지다 때때로 ‘블루스 필’로 김반장을 녹인다는 기타리스트 윤갑열(30), “흔치 않은 여자 베이스 주자”라는 말에 웃음기 없는 얼굴로 “제 주변엔 많아요(여대에서 실용음악을 공부했기 때문에)”라고 답하는 베이시스트 김문희(32). 이렇게 네명이 아소토유니온을 이끌어간다. 각자 따로 음악활동을 하던 이들 네명이 의기투합하여 성북구 동선동 지하 작업실에 들어온 게 2001년 12월. 이듬해 날씨가 따뜻해지자 지붕 없는 곳에서 사람들과 교감하는 게 ‘진짜 음악’이란 생각에 악기를 들고 홍대·이태원 등 거리로 나섰다. 기획사의 마케팅으로 급조되지 않은 이들은 거리의 들꽃과 잡초처럼 햇빛과 비바람을 맞으며 자라났기에 건강한 생명력을 발산한다. 때로 경찰의 압박도 들어왔지만 괘념치 않았다. ‘매드 펑크 캠프’(Mad Funk Camp)라는 타이틀을 당당히 내걸고 공연은 계속됐고, 춤꾼이나 스케이트 보더와 같이 길거리 문화를 즐기는 이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지나가던 중년의 신사나 이국의 병사까지도 잠시 발길을 멈추고 함께 어울릴 때면 정말 즐겁단다.
지하작업실에서 뒹굴고 거리에서 행인들과 교감을 쌓아가며 음반 작업을 병행한 이들의 노력은 2003년 11월 1집 <사운드 리노베이츠 어 스트럭처>(Sound renovates a structure·소리를 다시 재건축한다)로 결실을 맺었다. 거대한 홍보예산이나 무작위 방송출연 없이 2만장을 바라보는 놀라운 판매고를 올리게 된 건 그들이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생경한 ‘신인’이 아니며 거리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는 과정에서 생긴 ‘친구’들이 입소문을 내준 덕분 아닐까.
흑인들에 비하면 우린 택도 없다?
작업실로 내려가는 계단 벽면을 가득 채운 그래픽이 암시하듯, 아소토유니온의 음악적 뿌리는 흑인음악이다. ‘아소토’는 흑인 원시종교인 부두(Voodoo)교 의식에 쓰인 북으로 ‘아프로 비트’에 대한 멤버들의 열정적 탐구심을 의미한다. 노동조합이라는 뜻의 ‘유니온’은 여러 작은 문화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는 그들 방식의 단어이다. “음악적 취향이나 감성은 국적과 인종에 국한되지 않는 개개인의 깊이”라고 홈페이지에서 천명했듯이, 그들이 ‘솔풀’하고 ‘펑키’하고 ‘샤머닉’한 음악을 추구하는 이유는 단순히 흑인 감성을 쫓고 싶어서가 아니라 “좋은 흑인음악에 담긴 열정과 정신을 음악적으로 충실하게 표현하여 하나의 ‘문화’로 소화하고 싶다"는 바람에 있다.
“미국의 거리 음악가들은 하루 연주 쉬면 당장 그날의 끼니를 걱정하죠. 그들에겐 음악이 ‘밥’이고 ‘일’이에요. 그럼에도 구김살 없이 흥겹게 매일매일 연주하는 걔들을 보며 진짜 ‘솔’이다 싶었어요. 제일 싸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라면 한박스로 일주일을 버티기도 했지만 우린 사실 부모님 집에 얹혀서 무위도식하는 거지요.”(김반장) 흑인의 낙천성과 질김에 비하면 자기들은 택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에겐 지워지지 않는 낙천성이 엿보인다. “세끼 라면으로 때우다 사라지는 거, 그런 게 인생이죠. 가진 게 많아지면 그만큼 무거워지고, 그러면 인생은 버거워질 뿐이죠. 우린 지금처럼 지내면 충분해요. 그런데 ‘라면’얘기 너무 흔해서 뺐으면 좋겠는데….”(임지훈)
그렇기에 아소토유니온의 음악은 그들 말대로 ‘대즈’(Dazz)라고 부를 만하다. 댄서블 재즈(Danceable Jazz)의 줄임말인 ‘대즈’는 몸과 영혼이 들썩거리는 즐거운 축제를 지향한다. 이들은 ‘그루브’(흥겨움)한 분위기 속에서 음악의 열정에 전염되길 권유한다. 어쩌면 주말마다 팔도강산의 아줌마, 아저씨들이 전국노래자랑의 방청석에서 삶의 고단함을 잠시 잊고 있다가 들썩임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어이 한 바퀴 돌고야 마는 그 ‘흥겨움’과 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음반시장이 불황으로 맥없이 무너져내리는 요즘, 이들은 1970년대 음악들에서 느껴지던 단단한 열정 같은 것이 어느 순간 사라진 것이 아닌지 안타까워한다. “한국 음악이 이렇게 가라앉은 건 자업자득”이라며 매섭게 비판하는 임지훈은 “요즘 한국 힙합도 손쉬운 샘플링으로 모든 걸 다했다고 생각하니 쫀득쫀득한 맛을 느끼기 어렵다”며 일침을 놓는다. ”트렌드만 좇는 음악을 양산하면서 시장 자체가 축소된 것이니 할 말이 없잖아요.” 임지훈이 한국 음악의 현실을 ‘사필귀정’론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 있던 김반장이 김아무개 전 대통령이 탄핵 가결에 대해 언급한 ‘사필귀정’ 발언을 들먹이며 흥분한다. “아, 정말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라고 욱욱하는 그는 홈페이지에서 눈가림식 이주노동자 고용허가제의 모순을 지적하는 열혈청년이기도 하다.
3월26일부터 첫 단독콘서트
이들은 3월26~28일 서울 대학로 질러홀에서 첫 단독 콘서트를 연다. 이미 거리에서, 파티에서 여러 번 무대에 섰기 때문에 ‘처음’이라는 비장감은 없다. 그러나 분명 공연은 신나는 축제일 거다. 노래를 알고 따라 불러야 한다는 의무감도 없고 그들의 연주기술에 애써 감탄할 필요도 없다. 그저 즐기면 된다. 드럼과 콩가가 만들어내는 흥겨운 아프로 비트에 어깨를 들썩이며 몸으로 음악을 느껴준다면 이미 당신은 ‘100%의 관객’이다. ‘유니온’(연대)이 중요한 이번 무대엔 올드재즈에 맞춰 근사한 춤을 보여주는 댄스그룹 ‘밥스터 스켓’도 함께한다.
그렇다고 혹 현장의 열기를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워할 필요도 없다. 그렇기에 음반은 공장에서 복사되어 전국으로 배포되는 것 아닌가. 이참에 먼지 묻은 오디오에 아소토유니온의 음반을 걸어놓고 봄맞이 대청소 한판 해주는 건 어떨까. 청소를 마친 뒤 시원한 맥주 한잔 청할 수 있다면 인생은 아소토유니온처럼 ‘쉽게’ 즐거울 수 있다.

김문희 · 임지훈 · 김반장 · 윤갑열(왼쪽부터)은 거리공연을 통해 '실력'과 '정신'을 다져왔다.(박승화 기자)
‘아소토유니온’. 이들은 기존의 주류·비주류 뮤지션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음악적 토양을 다져온 밴드다. “탑골공원 할아버지들이 정말 우리나라 멋쟁이”라며 ‘여유 충만한 스타일’에 대한 경의의 뜻으로 ‘할아버지 중절모’를 애용하는 김반장(29·본명 유상철)은 특이하게도 드럼을 치면서 노래를 한다. 건반을 맡은 임지훈(32)은 흑인음악의 느긋함을 대변하는 레게파마 머리를 하고 있지만, 이성과 논리로 점철된 비판적 발언을 주저하지 않는다. 포크소년처럼 맑은 눈을 깜빡이며 온화한 미소만을 던지다 때때로 ‘블루스 필’로 김반장을 녹인다는 기타리스트 윤갑열(30), “흔치 않은 여자 베이스 주자”라는 말에 웃음기 없는 얼굴로 “제 주변엔 많아요(여대에서 실용음악을 공부했기 때문에)”라고 답하는 베이시스트 김문희(32). 이렇게 네명이 아소토유니온을 이끌어간다. 각자 따로 음악활동을 하던 이들 네명이 의기투합하여 성북구 동선동 지하 작업실에 들어온 게 2001년 12월. 이듬해 날씨가 따뜻해지자 지붕 없는 곳에서 사람들과 교감하는 게 ‘진짜 음악’이란 생각에 악기를 들고 홍대·이태원 등 거리로 나섰다. 기획사의 마케팅으로 급조되지 않은 이들은 거리의 들꽃과 잡초처럼 햇빛과 비바람을 맞으며 자라났기에 건강한 생명력을 발산한다. 때로 경찰의 압박도 들어왔지만 괘념치 않았다. ‘매드 펑크 캠프’(Mad Funk Camp)라는 타이틀을 당당히 내걸고 공연은 계속됐고, 춤꾼이나 스케이트 보더와 같이 길거리 문화를 즐기는 이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지나가던 중년의 신사나 이국의 병사까지도 잠시 발길을 멈추고 함께 어울릴 때면 정말 즐겁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