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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영화- 어른들의 로맨스를 복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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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3-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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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홉살 인생>의 소년 · 소녀들에겐 아홉살의 성장 통증은 없었을까

이성욱/ <씨네21> 기자 lewook@hani.co.kr

위기철의 베스트 소설이 다양한 에피소드 중심이었다면, 이를 영화화한 <아홉살 인생>(감독 윤인호, 각본 이만희)은 소년·소녀의 사랑 이야기를 주축으로 세웠다. 어느 가난한 지방의 초등학교 3학년 교실에 예쁜 만큼 새침하기 이를 데 없는 서울 소녀 우림이 전학오고, 속 깊은 사나이처럼 사는 여민이 그와 티격태격 다투며 사랑을 쌓아간다.

수사적 표현이지만 <아홉살 인생>에 ‘아이’는 없다. 다만 어른들의 지독한 판타지가 아홉살 소년·소녀들에게 응축돼 있을 뿐이다. 초등학교 3학년이지만 여민은 <엽기적인 그녀>의 복학생 견우(차태현)를 빼다 박았다. 그녀가 어떤 지독한 요구를 해와도 무던히 받아주는 넉넉한 순정파라는 점에서. 여민은 <비트>의 민(정우성)을 닮았다. 빼어난 싸움 솜씨를 갖고 있지만 그걸 권력화하지 않으려는 점에서. 여민은 <말죽거리 잔혹사>의 현수(권상우)와 비슷하다. 교사의 폭력이 난무하지만 섣불리 반항기를 드러내지 않고, 그녀를 좋아하지만 마음 한쪽에 쌓아둘 뿐 그 마음을 쉽사리 꺼내 보이려 하지 않으며, 또 다른 그녀가 불타는 연정을 쏟아부어도 비석처럼 꿈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민의 물리적 나이는 9살이지만, 그는 매력적인 남성 캐릭터의 요소요소를 빠짐없이 지니고 있다. 그런 그가 일과 연애와 우정에서 진정으로 실패할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아홉살 인생>은 ‘웰메이드’ 로맨스일 수 있어도, <개 같은 내 인생>이나 <정복자 펠레> 같은 ‘웰메이드’ 성장영화는 될 수 없다. <개 같은 내 인생>과 반대로 소년의 눈에 비친 세상이 불균질로 가득 차거나 모호하지 않고, <정복자 펠레>와 반대로 소년을 둘러싼 인간 군상이 지독스럽게 동물적이거나 부조리하지 않다. <아홉살 인생>은 ‘사이비 루저’ 여민과 ‘사이비 새침데기’ 우림을 내세워 판타스틱한 로맨스를 멋지게 연출할 뿐이다(<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이 아무리 희안한 짓을 해도 미워할 수 없는 상처를 가지고 있듯 우림은 남모를 아픔을 갖고 있다).


<아홉살 인생>이 웰메이드 로맨스가 된 데는 시간을 거꾸로 돌린 두 가지 작법이 유효했다. 어른들이 했으면 닭살 돋기 이를 데 없는 대사와 행동을 아홉살 소년·소녀에게 대행시키니, 그들의 애교에 기꺼이 녹아들 만하다. 또 ‘미제’가 최고였던 가난한 1970년대의 과거로 배경을 돌려놓았기에 아이들의 촌스러움과 다툼들은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며 흡인력을 상승시킨다.

그리고 관습적 에피소드! 교실에서 벌어지는 도난 사건이 촉발하는 위기감과 누명, 소녀가 물에 빠지고 소년이 구해내는 애정쌓기, 그리고 <소나기>처럼 가슴 한가득 애틋한 정만 남기고 떠나가버리는 소녀, 어머니를 위한 행동 때문에 오히려 어머니로부터 회초리를 맞는 가슴 찡한 오해…. 이 모든 것이 잘 조합된 덕에 상영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가지만, 굳이 ‘어른 뺨치는’ 아홉살 인생을 만들어내 ‘그 나이에도 지키고 싶은 여자가 있다’고 말하는 모진 오락성이 체증처럼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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