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이 아닌, 관직을 갈망했으나 좌절당한 이태백의 인간적인 모습 <영원한 대자연인 이백>
권혁란/ <이프> 전 편집장
막 버스가 끊기기 전, 차를 타야 한다. 내가 거하는 곳은 서울이 아닌 시골, 어서 빨리 맹물에 얼음을 띄운 물을 서둘러 청하고 그 물에 흐트러진 머리와 붉어진 얼굴을 오래 담그어 차갑게 식힌 뒤 몸과 마음의 흔들림을 멈추고 집으로 가야 한다. 두세개로 겹쳐 보이는 저 얼굴들과 작별하고 바퀴벌레가 벽을 타고 올라가는 이 자리를 파해야 한다. 초인적인 의지로 술자리를 박차고 나와 머나먼 집으로 온다. 대문이 잠긴 지도 불이 꺼진 지도 오래인 집. 호기롭게 문을 박찰 순 없다. 벽을 타고 기어 올라간다. 기이한 힘이 나를 밀어올려 담장 위에 올라간다. 가까워진 달이, 붉다. 안경알에 묻은 붉은 찌개국물 탓이다. 술기운에 배배 풀린 다리는 마치 관절이 없는 듯 부드럽다. 오늘도 그렇게 장진주(將進酒)를 읊으며 대취했으니 할 일을 다하였다! 꽤 높은 담장 아래로 나는 뛰어내린다. 그렇게 보낸 몇년의 세월. 그렇게 숱하게 넘어지고 그렇게 모질게 뛰어내렸는데도 다친 데가 하나도 없다니! 그렇게 술을 마셨는데도 시 한수 얻은 게 없다니!
그랬어도 그 시절, 스물 즈음엔 ‘시인’처럼 살았다. 뜻이 맞는 자 있으면 반드시 그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교유하는 것, 가슴속에 품어 맺힌 시 구절 하나로 밤을 새우는 것, 술기운 알알해지면 무어라도 되는 양 주섬주섬 필을 꺼내 휘갈기는 것…. 맨정신으로는 한줄 알아보지 못할 이른바 일필휘지의 글들이라니. 그땐 말술을 마시고도 취하지 않고, 취한 뒤엔 옥고를 써내려가고 새벽이면 부끄러워 종이를 구겨버린다는 현세의 이름난 시인들을 흠모했고 흉내내기에 바빴다. 술자리에서 시인들의 기행과 울분과 애수는 바로 나의 것이었다. 영어 한자라도 공부해야 할 시간에, 상식 하나라도 외워둬야 할 판에 웬 시 나부랭이며 소설 쪼가리를 붙들고 있냐고 두들겨 맞던 그 시절, 빗도 안 들어가게 봉두난발을 휘날리던 그 시절 어느 즈음엔가 이백을 만나긴 했을 것이다. 술을 좋아한 시인으로, 달을 따라간 신선으로, 대붕의 뜻을 품은 지사로, 그러나 뜻이 꺾여 떠돌이가 된 사람으로. 가방에 넣어둔 <관철동 시대>라는 책 속의 시인들처럼 이태백도 공연히 끼어들어 술안주가 된 적도 있었을 터.
세월이 흐르고 흘러 이태백이 나이 마흔둘에 세상에 나아가 뜻을 펼치려고 검은 머리칼 속에 솟아오른 흰머리를 솎아내며 “내 아직 늙지 않았다”고 외치던 그 나이가 되어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그래서 소회가 더 깊다. 중국 시베이대학 교수 안치(安旗)가 쓴 <영원한 대자연인 이백>(이끌리오 펴냄)이라는 간단명료한 제목의 책을 방바닥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집으며 읽는 재미는 쏠쏠하나 마음은 편편치 않았다. 이토록 하 수상한 시절에, 신선처럼 시를 썼다고 알려진 그가 평생 경국제세의 뜻을 세우고 날마다 전전반측하며 조정과 백성의 삶을 다스리고자 하는 웅지를 품었다고, 사실은 ‘신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고 속속들이 파헤친 글이라니. 세상사에 홀연히 등지고 은거하며 음풍농월 했으리라 미루어 짐작했던 그가 실로 온 생을 사는 내내 뜻을 알아줄 사람을 찾아, 조정에 말을 넣어 천거해줄 사람을 찾아 형주로, 익주로, 낙양으로, 금릉으로, 장안으로 떠돌아다녔다는 사실은 예전엔 미처 몰랐던 일이다. 달 그림자를 따라 물 속으로 들어갔다는 그가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며 장탄식을 하고 시 속에 분노를 서리서리 담아 풀어냈다니. 관직에 나가지 못한 신세한탄이 울분으로 쌓여 가위눌림의 꿈속을 전전했다니, 한 시절 ‘낭만고양이’였던 내가, 그래서 낭만의 대선배로 모신 그가 날 배신한 것처럼 공연히 섭섭하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그의 뜻이 다만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귀와 재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로 제대로 된 정치를 해보기 위해서였다니, 마음 달랠밖에. 오늘날엔 이백만큼 순수한 ‘뜻’을 품은 자도 드물기에. 정치판 흉흉한 오늘날, 이태백의 장진주를 다시 읊으며 술 한잔해야겠다. ‘술을 드시게, 그대들은 멈추지 말고. 노래 한곡 불러줄 테니 그대들은 귀를 기울여보시오. 부귀와 재물은 귀하지 않다오. 다만 바라기는 오래 취하여 깨지 않기를.’

『영원한 대자연인 이백』, 안치 지음, 신하윤 · 이창숙 옮김, 이끌리오 펴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