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구찌, 미워미워…

501
등록 : 2004-03-18 00:00 수정 :

크게 작게

뉴욕 출신의 천부적 디자이너 톰 포드 ‘탄핵 소추’

김경/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얼마 전 일 때문에 피렌체와 밀라노를 여행했는데, 그 여정에서 느낀 점은 ‘여자들에게 이탈리아만큼 위험한 나라는 없다’는 것이었다. 남자들이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그러하듯이, 여자들은 이곳에 가면 곧잘 이성을 잃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패가망신하기 딱 좋다. 이 나라에는 동양 여자만 보면 ‘허리띠 풀고 한번 놀아보자’는 의도로 끊임없이 달콤한 추파를 보내는 매력적인 바람둥이들이 즐비하고, 수많은 도둑놈들과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들이 방심한 여행객의 호주머니를 완전히 홀랑 털어가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가장 무서운 건 국내보다 30%에서 50%까지 싼 명품 브랜드들의 유혹이다. 정신없이 쇼핑하다보면 짐이 출국시보다 2배, 3배로 늘어나는 게 보통인데, 어떤 여자들은 공항에서 그 짐에 대한 추가 요금도 못 낼 정도로 돈을 다 써리는 바람에(일행 모두 은행 잔고도 없고 신용카드의 한도액도 넘은 경우) 짐을 붙여놓고도 비행기를 못 타는 아주 난처한 일까지 겪고 만다.

그만큼 이탈리아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패션 강국이다. 세계의 직장 여성들이 한달치 월급과 맞바꾸고도 행복해한다는 구찌, 프라다, 베르사체, 발렌티노, 이브 생 로랑, 조르지오 아르마니, 페라가모, 돌체 앤 가바나와 같은 명품 브랜드들이 죄다 이탈리아산(産)이다. 그렇다 보니 여성복이든 남성복이든 이탈리아 모드는 곧 세계 최고의 핫 트렌드를 의미한다. 때문에 1인당 국민총생산이 2만달러가 넘는 이탈리아는 G7에 속하는 선진 공업국인데 전 국민의 대부분이 불황을 모르는 패션산업과 관광산업 혹은 그 언저리에 매달려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패션 강국이 국제 무대에 데뷔한 역사는 생각만큼 오래되지 않았다. 1951년 이탈리아의 사업가 바티스타 조르지니가 피렌체 자택에 미국 바이어들을 불러 패션쇼를 연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미국 시장의 요구에 맞는 이탈리아 모드가 크게 어필한 것이다. 살바토레 페라가모나 조르지오 아르마니 등은 할리우드 배우들을 포함해 미국의 패션 리더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파악하고 적당한 디자인을 만들어낸 덕분에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파산 직전의 한물간 브랜드로 낙인찍혔던 브랜드 구찌가 1990년대 들어 다시 급부상하며 최대의 번영기를 누릴 수 있었던 계기도 29살의 뉴욕 출신 디자이너 톰 포드를 영입했기 때문이다. 한때 TV광고 모델로도 활동한 톰 포드는 처음에는 구찌의 전통 위에 뉴욕의 거리와 나이트클럽 등에서 영감을 얻은 섹시함과 실용성을 반영했다. 그리고 1994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승격하면서부터는 ‘forgotten about sex’라는 슬로건으로, 과거 고급스럽지만 양성적인 구찌의 이미지에서 도발적이면서도 섹시한 스타일을 끌어냈다. 말하자면 그는 클래식과 모던,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점을 찾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런데 그 톰 포드가 구찌사에서 탄핵소추당했다. 4월에 퇴사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흔히 쓰듯 ‘일신상의 사유’가 아닌 게 틀림없다. 구찌의 경영권을 둘러싼 자들이 날이 갈수록 영향력이 커지는 톰 포드를 이쯤에서 그냥 밟아버리자고 작당했는지도 모른다. 지난 밀라노 컬렉션에서 톰 포드의 마지막 쇼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한 패션 관계자는 구찌가 예전의 ‘파올로구찌’ 같은 낡은 시대로 되돌아갈 수도 있겠다고 걱정했다.

밀라노에서 구찌 옷을 많이 산 내 동료는 무리로부터 괜히 눈총을 받았다. 그런데 국내 매장에서도 그 악영향이 미친다고 하니, 톰 포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보복이 시작된 모양이다. “아, 나도 슬프다. 내 나라를 사랑할 수 없는 이 진흙탕 같은 현실이…. 그는 아직 칼도 빼지 않았는데….”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