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주먹짱’은 허전했다
등록 : 2004-03-18 00:00 수정 :
연극 <남자충동> 무대에 다시 서는 중년배우 안석환… 관록붙은 조폭 연기로 ‘수컷습성’ 가감 없이 보여줘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극중 이장정은 알 파치노의 그늘을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 안석환은 남자되기의 괴로움을 농익은 연기로 보여준다.(황재헌)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로 널리 알려진 연출가 임영웅씨는 “작품의 ‘의미’를 찾지 말고 그냥 웃으며 보면 된다”고 했다. 심각하게 의미를 생각하다가 정작 웃음을 터트릴 장면을 놓쳐 작품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며 한 말이다. 때론 연기자가 관객의 느낌을 사로잡아 극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그랬다. <고도를…>에서 안석환은 70대 귀여운 노인 에스트라공으로 분해 조그만 입으로 무수한 대사를 쏟아냈지만 그보다 더한 말을 동그란 눈으로 말하는 듯했다.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는 그의 연기엔 웃음보다 진한 ‘느낌’이 꿈틀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고도를…>에서 남긴 강렬한 인상은 대중의 뇌리에 깊숙이 꽂혔다.
바닥인생 · 코미디에 배어나는 원초적 감성
우리가 연극 <남자충동> 앙코르 공연에서 이장정 역으로 다시 만나는 안석환, 그의 연기는 변신의 연속이었다. 창작극을 주로 올린 연우무대에서 배우수업을 받은 그의 대사 처리에는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자연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난다. 1987년 <달라진 저승>을 데뷔작으로 무대에 오른 뒤, 초창기에는 하류 인생을 도맡다시피 했다. <4월9일>(1989)에서는 인혁당 사건의 사형수로, <칠수와 만수>(1990)에서는 페인트공 만수를 맡는 등 밑바닥을 전전했다. 그의 연기에 시대의 고민이 새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지난해 영화 <선택>에서 그가 장기수 김선명씨 등에게 혹독한 전향 공작을 벌이던 비전향 장기수 전담 반장 역을 맡았던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안석환은 밑바닥에서 시대를 연기하면서 코믹한 캐릭터를 구축하기도 했다.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에서 민족과 국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개인의 부귀영화에만 사로잡힌 인물을 코믹한 연기로 그려내 주목받았다. <거미 여인의 키스>(1994)에서 기다란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파마까지 한 곱상한 게이 역을 맡아 익살스러운 연기로 양성적 매력을 선보였다. 당시 그는 스스로를 사슴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게이 연기에 몰입했다고 한다. 그의 연기는 영화에서도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그의 연기는 <넘버3>의 넘버 원으로 시작해 <하면 된다>(2000년), <네 발가락>(2002년)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이어졌다. 그의 코미디 연기는 결코 튀지 않는다. 그가 날리는 웃음펀치엔 우리가 못다 풀어낸 잠재적 충동과 잃어버린 원초적 감성이 담겨 있다.
<남자충동>의 ‘장정’을 무대에서 처음으로 만난 지 벌써 7년이 흘렀다. 어느덧 안석환도 중년의 배우로 우리 앞에 다가왔다. 켜켜이 쌓인 세월의 더께 아래에서 끊임없는 변화를 이끌어온 힘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얼굴에 세월의 흐름이 새겨져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는 ‘고집스러운’ 연기자일 뿐이다. 그에게 장정은 떼어놓을 수 없는 연기의 분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집의 거실에 걸린 영화 <대부>에서 막내 마이클 꼴레오네 역을 맡은 알 파치노를 흉내낸 포즈의 대형 포스터는 7년 동안 그를 지켜주는 ‘장승’ 같은 구실을 했다고 한다. 그가 닮고 싶었던 것은 알 파치노의 얼굴이 아니라 혼을 담은 연기,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연기를 보여줬던 <남자충동>은 초연 당시 백상예술대상·서울연극제·동아연극상·젊은예술가상 등 웬만한 연극상을 휩쓸어 연기파 배우 안석환으로 우뚝 섰다.
알 파치노와 시라소니를 닮으려던 조폭 장정은 어떻게 변신했을까. 보디빌딩으로 상체를 우람하게 키워 목포 허름한 뒷골목의 ‘주먹짱’ 장정을 폼생폼사식으로 연기하던 7년 전의 그가 아니었다. ‘원조 조폭’은 세월의 무게감을 털어내 오히려 좀더 가벼워진 모습이었다. 마치 <이 세상 끝>(1996)에서 10여초 간격으로 다른 모습을 연기했던 것처럼 7년을 가볍게 건너뛴 듯했다. 차이가 있다면 초연 때의 젊은 ‘패기’가 중년의 ‘관록’에 압도당하고 있다는 것뿐. 아버지 ‘이씨’ 역의 정진각씨와 영화 <올드보이>로 낯익은 달수 역의 오달수씨, 영화 <지구를 지켜라>로 춘사영화제 신인연기상을 받은 황정민씨 등 이번에도 함께 출연하는 초연 멤버들 모두 마찬가지다. 관객을 주눅 들게 만든 이글거리던 안석환의 눈빛에는 예전의 ‘멋’보다 한수 위의 여유로운 ‘맛’이 느껴진다. 어쩌면 멋지지 않은 그것에 가족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생존의 법칙으로 삼았던 원조 조폭의 진면모가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남자’되기의 괴로움에 시달리는가
<남자충동>의 원래 제목은 ‘남자의 적들’. 그들은 다름 아닌 남자 바로 자신에게 있는 것이었다. 장정이 내면에 촘촘히 새겨진 강한 남자에 대한 열망, 패거리 속에 속해야만 편안함을 느끼는 마초적 습성 등을 대표한다면, 동생 유정은 남자가 얼마나 왜소하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안석환이 연기한 7년 전의 장정은 어쩔 수 없는 건달이었지만 다시 등장한 장정은 ‘강한 패밀리’를 만들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어딘가 허전한 양아치에 가깝다. 그렇게 패기에 ‘과장’되었던 무대의 인물이 어디에선가 본 듯한 실감나는 인물로 거듭난 셈이다. 관객들 역시 ‘내 안에 있을지도 모르는’ 수컷의 습성을 보았다면, 이번에는 ‘내 안에 있는’ 남자의 심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무대와 현실의 무너진 경계를 확인하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다.
“사내가 세상에 태어나 큰 뜻을 품어야 허는디. 크게 성공허든가 실패허든가 두 길이여. 긍게 중간은 안 혀. 이장정 장렬허게 죽다. 그 소리 듣고 잡구만.” 그 ‘사내다움’을 꿈꾸며 동네 나이트클럽을 지켜내려던 장정의 마지막 독백은 안석환의 진가를 숨김없이 보여준다. 대사 하나를 통해 인물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 재주가 남다른 것이다. 드라마 <좋은 사람>이 종영된 뒤, 주인공보다 범죄조직 보스 역을 맡았던 그의 모습이 선명히 기억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자들이 선망하는 모습과 그 이면에 감춰진 위선과 강박 등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남자충동>. 여전히 가장다운 가장이라는 숙명을 떨쳐내지 못하고 ‘남자’되기의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면 폭력적이면서 연약한 남자 이장정을 만나볼 만하다. 어쨌거나 안석환이 연기하는 남자의 폭력충동은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 남자, 강박 더 심해” [연출자 조광화씨 인터뷰] 연극열전 네 번째 작품이며 악어컴퍼니 우수 레퍼토리 정착 시리즈 2탄으로 무대에 오르는 연극 <남자충동> 연출자 조광화씨를 만났다. 오는 4월18일(동숭아트센터 동숭홀)까지 계속될 공연을 위해 마지막 리허설을 준비하는 조씨는 7년 만의 재공연에 대한 부담보다는 기대가 커 보였다.
- <남자충동>이 초연 때 작품성과 대중성을 인정받은 뒤 7년 만에 무대에 오르는 이유는.
= 그동안 재공연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작비를 마련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고, 초연 배우들이 공연과 영화 등에서 ‘너무 잘나가’ 한곳에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초연 성공에 대한 부담감이 족쇄로 작용하기도 했는데, 이번 연극열전에 초대돼 기쁘게 공연을 준비할 수 있었다.
- 초연 때는 조폭 문화가 나름대로 신선했지만, 지금은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주요 소재로 삼는 상황인데.
= 애당초 <남자충동>에는 ‘주먹쥔 아들들의 폭력충동’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폭력충동을 다루고 있지만, 그 내용은 극에서 3분의 1가량 차지할 뿐이다. 목포의 한 가족 삶을 통해 가족애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 남자들의 현실이 예전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 여러 강박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는 남자들의 현실은 예전 그대로다. 요즘 남자들의 강박이 더 심하다고 볼 수도 있다. 힘이 있어야 하고 잘생기기도 해야 하지 않은가. 허세를 부리고 무리를 해야 하기에 폭력충동이 생기는데 결국 자신도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 주요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7년이 지난 뒤에 연기하면 현실감이 떨어지지 않나.
= 사실 그 부분을 많이 염려했다. 그래서 1, 2조로 나눠 노련미와 신선미를 보여주려고 한다. 초연 당시 배우들은 풋풋한 연기를 펼쳐 어리숙함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 초연 배우들이 원숙한 연기로 이전과는 다른 정제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 장정 역을 맡은 안석환씨의 경우 40대 중반의 나이에 20대 후반의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데.
= 초연 때 안석환씨는 코미디물을 많이 해서 ‘폼’이 나지 않는 사람이 폼을 잡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웃기던 사람이 조폭을 연기하는 이중적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넘버 원’으로 영화에 출연하기도 해서 이미지상 주는 재미는 덜한 게 사실이다. 물론 물을 만난 배우의 농익은 연기를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 이전과 다른 앙코르 공연만의 특징은 무엇이 있는가.
= 기본 흐름은 초연 때 그대로다. 다만 ‘단단’의 대사를 자연스럽게 바꿨을 뿐이다. 관객들이 모든 배우들의 개성을 주목하면 눈물 속에서 웃음을 찾고, 웃음 속에서 눈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출연자 한명한명의 맛을 진하게 체험하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