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마술피리 소리가 들리는구나

501
등록 : 2004-03-18 00:00 수정 :

크게 작게

수구세력을 벼랑으로 모는 신기한 피리 소리가… ‘20년대 이승만 탄핵’과 정반대인 2004년 3월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1920년 12월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대통령직에 선출된 지 무려 15개월 만에 상해에 도착했다. 그리고 5개월여가 지난 1921년 5월 말, 이승만은 일본 첩자를 따돌린다는 핑계로 훌쩍 상해를 떠났다. 1925년 3월 마침내 의정원의 탄핵 결의로 대통령직에서 축출될 때까지 66개월 동안, 그가 정부 소재지인 상해에 체류한 기간은 재임기간의 ‘10분의 1’에도 훨씬 못 미쳤다.

1920년 12월28일 상하이에서 열린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식. 이승만에 대한 탄핵안은 너무나 엄중한 일을 두고도 질질 끌다가 결국 임시정부를 빈사 상태에 빠뜨린 다음에야 처리된 것이었다. 가운데 꽃다발 두른 이가 이승만.

신채호 · 이동휘 · 안창호도 떠나고…


이승만은 원래 3·1운동 직후 결성된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총리로, 한성 정부에서는 집정관 총재로 선출되었다. 이승만을 정부 수반으로 선출한 두 정부 어디에도 대통령이란 직제는 없었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자신을 대통령(President)으로 칭하며 다녔다. 안창호는 상해 임시정부는 국무총리제, 한성 정부는 집정관총재 제도를 채택했기 때문에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 직명이 없다면서, 현행 헌법하에서 이승만이 대통령 행세를 하는 것은 명백한 헌법 위반이라는 경고의 편지를 보냈다. 이에 이승만은 “이미 대통령 명의로 각국에 국서를 보냈으니 문제제기를 해서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 일치를 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될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떠들지 마시오”라는 오만한 답장을 보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래도 안창호가 동분서주하며 사람들을 설득하여 통합 정부로 새출발하는 상해 임시정부의 헌법을 대통령제로 변경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조선을 미국이 위임 통치하도록 해야 한다는 서한을 보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새로운 파란이 일었다. 신채호 등 강경파는 절대독립을 목표로 한 임시정부의 수장에 위임 통치를 주장하는 자가 선출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항의하다가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임시정부를 떠났다. 위임 통치 문제는 이승만의 대통령 취임 때부터 결국 6년 뒤 그의 탄핵에 이를 때까지 내내 문제가 되었다. 대통령 칭호 문제는 상해 정부의 요인들이 이승만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크게 양보했음에도 잘 풀리지 않았다. 미국에 있는 이승만이 자신을 대통령으로 뽑아준 상해 정부에 공문을 보낼 때 일부러 한성 정부의 집정관 총재란 칭호를 고집한 것이다.

일부러 집정관 총재라는 타이틀로 공문을 보내는 대통령 이승만에게 상해 임시정부의 총리 이동휘는 제발 헌법을 존중해달라고 호소했다. 대통령 이승만의 답변은 참으로 걸작이었다. 헌법을 지키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아직 헌법을 읽어보지 않았노라고…. 원래부터 이승만을 탐탁히 여기지 않았던 괄괄한 성격의 이동휘는 바다 건너에서 그런 소리를 해대는 이승만을 보고 “대가리가 썩었다”고 펄펄 뛰었다. 이승만을 통합 임정의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당대의 인격자 안창호조차 이승만을 가리켜 ‘정신병자’라며 진저리를 쳤다. 이동휘는 저런 대통령 밑에서는 총리 못해먹겠다며 상해를 떠났다.

3월12일 국회의 탄핵결정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하는 김기춘 법사위원장(오른쪽 두 번째)과 김용균 한나라당 간사(오른쪽). 한 사람은 유신헌법의 초안을 잡은 이이자 초원복집 사건의 주역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친일진상규명 법안을 끝까지 깔고 뭉갠 이다.(김태형기자)
어디 이동휘뿐이었으랴. 결국은 안창호도 떠났고, 이승만을 적극 옹호하던 이른바 기호 출신의 총장(장관)들도 사임했다. 후계 내각은 구성되지 않았고, 임시정부는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상해에서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어 임시정부를 근본적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입장과, 임시정부는 개조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졌기 때문에 독립운동의 최고영도기관을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해야한다는 논란만이 끝없이 계속되었다. 빈사 상태에 빠진 임시정부의 의정원은 1924년 대통령 유고안을 통과시켰고, 결국 1925년 3월 저런 사람을 ‘하루라도’ 국가 원수 자리에 두고는 독립운동의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고 국법의 신성함을 유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순국선열을 뵐 명목도 없고 살아 있는 독립투사들의 소망도 아니라면서 탄핵안을 가결했다.

'오징어 놀이'의 추억을 떠올리다

그로부터 8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대한민국 국회는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했다. 이승만의 경우는 이쯤 돼야 탄핵 사유가 된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엄중한 일을 질질 끌다가 결국 임시정부를 빈사 상태에 빠뜨린 다음에야 겨우 탄핵안이 처리된 것이었다. 반면, 현재의 사태는 도무지 탄핵거리가 되지 않는 일을 너무나 빨리 무리하게 처리했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보면서 어린 시절 아련한 ‘오징어 놀이’의 추억을 떠올렸다. 어떤 우스갯소리에도 나왔지만, 옛날에 아이들 참 많이 죽었다. 금 밟아서…. 오징어 하다보면 늘 금 밟았네, 아니네 하고 싸우게 마련이다. 대개 자연스러운 다수결이 내려져 문제가 없지만, 아주 가끔은 싸움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번의 탄핵안 발의와 통과는 아이들끼리 금 밟았다 아니다를 다투다가, 갑자기 금에 닿기만 해도 무조건 죽는 거야 하면서 진짜 죽으라고 회칼을 휘두른 꼴이다. 이런 애들하곤 다시는 놀면 안 된다.

지난 1987년 이후 한국 사회는 아주 더디지만 민주화 과정을 밟아왔다. 더 이상 군사 반란의 주역들이 대통령이나 장관 자리를 차지하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된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의 출범이 자민련의 도움을 받아야 가능했다는 불행한 역사가 상징하듯 과거 청산은 없었다. 군사독재 정권이 어디 군 출신들만으로 가능했을까? 그 시절 그들과 손잡았던 사람들, 고문과 조작 사건의 배후에 있던 사람들, 지역감정을 유발하던 사람들, 그리고 유신의 자식들과 5공의 졸개들은 아직도 건재하다. 예전과 같지는 않지만,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한국 사회 전체를 지뢰밭으로 만들고 있다.

친일의 진상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의 진상을 규명하자는 법안들이, 군사독재 정권의 의문사를 파헤치자는 법률이, 어떤 수모를 겪었는지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안다. 이번에 국회의 탄핵결정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하러 간 법사위원장과 한나라당 간사는, 한 사람은 유신헌법의 초안을 잡은 자이자 “우리가 남이가?”라는 지역감정 선동으로 유명해진 초원복집 사건의 주역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친일진상규명 법안을 끝까지 깔고 뭉개 대중적 인지도를 급격히 높인 자였다. 이는 단순한 우연일까? 역사학도로서 나는 감히 이 한장의 사진이 바로 온 나라를 뒤흔든 탄핵 사태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과거 청산 없는 민주화가 초래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1987년의 6월항쟁에 이르는 과정은 군사독재 세력의 추락과 민주세력의 부활이었다. 그러나 군사독재의 추락이 멈추고 민주세력의 상승이 저지되는 변곡점은 지역주의에 의한 민주세력의 분열이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의 패배에서 1990년의 3당 합당으로 군사독재 세력인 민정당과 유신 잔당인 공화당, 그리고 민주 진영에서 이탈한 통일민주당은 ‘한 지붕 세 가족’의 거대 여당 민자당을 만들었다. 그러나 영원할 듯싶던 ‘민자의 전성시대’는 내분과 부패와 무능으로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갑신정변과 탄핵 쿠데타의 닮은 점

2004년의 탄핵 사태도 한나라당·민주당·자민련의 야합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세력은 다시 분열했고, 신·구 독재 세력과 손을 잡았다. 그러나 한민자를 주연배우로 한 민자의 전성시대 속편은 전편에 비해 훨씬 빨리 막을 걷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탄핵안이 통과됐을 때 그 자들은 엄청난 거사에 성공한 것처럼 희희낙락했다. 한나라당의 대표란 자는 자기 입으로 ‘의회 쿠데타’의 성공을 축하했고, 대변인이란 자는 ‘갑신정변’이라 불러달라고 기자들에게 주문했단다.

민주주의가 짓밟힌 것이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주체할 수 없던 차에 갑신정변 운운하는 기사를 보자 기가 막혀 눈물이 다 흘렀다. 어쩌다 역사가 이 지경에 이르러 저 불한당들이 감히 근대화의 꿈과 좌절이 담긴 갑신정변을 들먹이는가 하는 생각에 이를 북북 갈며 갑신정변과 탄핵 쿠데타가 닮은 게 딱 하나 있다는 칼럼을 썼다. 갑신정변이 주체적 준비의 부족에 외세의 개입이 겹쳐 3일천하로 끝났다면, 자칭 제2의 갑신정변은 조금 길게 33일천하로 끝날 것이라는 닮았다면 닮은 점이다. 4월15일이 바로 그날이다.

임기가 한달 남은 국회가 임기가 4년이나 남은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은 참으로 참담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분노가 오늘 ‘시일야방성대곡’의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지 않아도 되는 것은 총선이 한달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저들 193명이 지배하는 국회가 한 3년쯤 임기가 남아 있었다면 우리는 왜 헌법이 저런 가당치도 않은 것들 손에 대통령을 탄핵하는 권한만 쥐어주고, 국민들이 못된 국회의원들을 소환하는 길은 만들어놓지 않았냐며 머리를 쥐어뜯었을 것이다. 어디 머리만 쥐어뜯고 눈물만 흘렸을까? 우리는 기꺼이 안중근·나석주의 후예가 되고, 윤봉길·이봉창의 제자가 되고, 아니면 멀리 유학을 가 빈 라덴에게 제대로 배워보든지, 하다못해 의사당에 똥물을 뿌린 김두한이라도 닮으려 했을 것이다.

광화문 집회, 이렇게 흥겨울 수가

3월12일, 그날은 절규였고 통곡이었고 몸부림이었다. 문뜩 1991년 봄의 분신 정국이 떠올랐다. 온 나라가 그때보다 더 심한 절망에 빠져들어가는 것 같았다. 3월13일까지도 사람들을 광화문으로 내몬 것은 참담함과 분노였다. 그런데 막상 광화문에 가보니 분위기는 너무 뜻밖이었다. 저들에 차례진 33일을 기다릴 필요 없이 단 하루 만에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흥겨운 춤판과 무대에서는 ‘부라보, 부라보, 아빠의 청춘’ 같은 노래까지 나왔다. 2002년의 촛불시위 때 더 많은 인파가 모였지만, 이렇게 흥겨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미선이·효순이의 죽음을 추모하는 경건한 마음으로 모였고, 10만이 모였다 해서 지금 당장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난 주말의 촛불 ‘축제’는 달랐다. 우리 손으로 확실하게 쿠데타를 응징할 날짜를 받아놨고,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었으니까. 섣부른 불장난으로 역풍을 맞은 쿠데타 세력의 몰락에 대해, 우리가 경건한 추모의 마음을 보여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으니까.

아직 저들의 의회 쿠데타를 다 진압하지는 못했기에,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이 남아 있기에, 그리고 저들이 총선 연기니 내각제 개헌이니 하는 장난을 칠 여지가 남아 있기에 광화문의 흥겨운 분위기는 분명 성급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1987년의 박종철군 고문치사 및 은폐조작 사건을 기억하자. 6월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종철이의 죽음보다도 그 죽음의 은폐조작이 폭로된 것이 아니었던가? 의회 쿠데타 세력이 탱크를 앞세우고 헌법을 정지시키지 않는 한, 최악의 시나리오로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받아들인다 해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안 할 수 없으며, 내각제 개헌을 날치기로 통과시킨다 해도 국민투표와 국회의원 선거는 반드시 해야 한다. 저들이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10만명이 촛불을 들고 모이는 한국 민주화 운동의 저력마저 탄핵해 권한을 정지할 수는 없다.

한국은 유달리 정치적 관심이 높은 나라이면서도 정치적 환멸이 강하고 정치에 침을 뱉고 기꺼이 투표권을 포기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겪은 뒤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 ‘투표하지 않으려다 꼭 투표하기로 마음을 바꿨다’는 사람이 44%로 ‘처음부터 투표하려 했고 꼭 투표할 것이다’라고 답한 40%를 앞섰다. 사람들은 정치에 환멸을 느꼈지만, 환멸로 답할 수 있는 도를 넘자 사람들은 응징을 결심한 것이다.

한국의 현대사가 격동의 연속이다보니 오래 살지 않아도 별 희한한 경험을 다 하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총칼로 헌법을 짓밟은 군사 반란의 수괴들을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기 위해 최루탄 가스를 마셔야 하더니, 이제는 내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유신과 5공의 자식들로부터 지키자고 촛불을 들어야 한다. 이 어둠 속에 촛불을 밝혀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숨죽여 살아온 양심적인 보수세력이다. 친일파의 발호 아래, 전쟁의 광기 속에서, 민간인 학살의 섬뜩한 칼날 아래, 그리고 군사독재의 서슬 푸른 불호령 아래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그들을 불러내야 한다. 진보세력이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다 이리저리 차이고 터지고 있을 때 못 본 척 외면한 자들에게 무슨 양심이 있겠냐는 오만과 편견은 던져버리자.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한번 물어야 한다. 저 쿠데타를 보고만 있을 것이냐고….

우리 현대사의 불행은 똥과 된장처럼 다를 수밖에 없는 수구반동과 보수주의자, 또는 자유주의자들이 한데 뒤섞여왔다는 것이다(2001년 8월8일 371호,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참된 보수를 아십니까). 2002년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이회창 총재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한나라당이 합리적인 보수세력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했다. 심지어 이문열 같은 사람조차- 누가 누구 얘길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보수세력이 그동안 수구세력과 너무 가까이 지낸 것을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은 뒤섞여 있던 수구와 보수가 결정적으로 분리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오랫동안 보수적인 입장의 평범한 사람들은 대개 수구의 헤게모니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해왔다. 그러나 이 번에는 수구세력이 호기롭게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뛰어나갔지만, 보통 사람들은 해도 해도 너무한다며 제자리에 있으니 자연스럽게 수구와 보수의 분리가 일어난 것이다. 13일 광화문에서는 두 가지 소품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50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든 “나, 이회창 찍었다구”란 작은 피켓이고, 또 하나는 젊은 아가씨가 등에 써붙인 “나, 노사모 아니라니까”라는 종이였다. 현재의 상황을 친노 대 반노의 사생결단인 것처럼 몰고 가려는 쿠데타 세력의 음모는 시민들의 상식 앞에 이미 힘을 잃고 있었다.

쿠데타! 수구반동은 해도, 파시스트는 해도 그리고 혹시 진보세력은 해도, 보수주의자라면 절대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온몸을 내던져 막는 것이 바로 쿠데타다. 지금 이 순간 이 땅의 개혁세력과 양심적인 보수세력이 그간의 섭섭한 마음을 떨쳐버리고 민주주의의 룰을 세우기 위해 손을 잡을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수구반동에 맞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느냐, 아니면 지난 수십년간 길들여진 그대로 수구세력에게 끌려가느냐,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보수주의자들에게 달려 있다.

6월 항쟁의 성과를 지켜 내는 일,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 미완의 4월혁명에 마침표를 찍는 일, 유산된 시민혁명을 마침내, 마침내 완수하는 일을 통해 보수주의자들은 역사의 수레를 밀고 나가는 두 바퀴의 하나로 우뚝 서야한다. 3ㆍ15 부정선거가 4월혁명을 낳았듯이 3ㆍ12 의회쿠데타는 합리적이고 양심적인 보수세력의 화려한 부활을 통해 또다른 4월혁명을 낳을 것이다. 그래야 진보세력도 산다.

수구와 보수가 분리될 호기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자살골과 역사의 진보 사이에는 어떤 함수 관계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직 그 답을 하기는 이르지만, 지금 시점에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살골도 괜히 아무 때나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살충제 만드는 어떤 사람은 그러더만, 숨어 있는 바퀴벌레는 일일이 잡을 수 없는데 자기들끼리 한데 모이는 냄새나는 약만 만들면 떼돈을 벌거라고…. 내 귀에는 지금 마술피리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온 나라에 들끓던 쥐떼들을 한데 모아 벼랑 끝으로 몰고 갔다는 그 신기한 마술피리가….

그 처절했던 날 우리들의 가슴을 때린 국회의장님의 말씀은 의장님을 포함한 쿠데타 세력에게 돌려드려야 하지 않을까? ‘자업자득’이란 문자는 이런 때 쓰는 거라고! 대한민국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전진한다고! 하루아침에 전 의원의 김민석화를 이루어 단 한석의 지역구 당선도 장담할 수 없게 된 쿠데타군의 선봉 민주당을 넘어 역사는 전진한다고! 이리 망하나 저리 망하나 마찬가지인데 탄핵 카드도 못 쓰고 망하면 너무 억울하다는 민주당을 부추겨 불장난을 치다가 곳간까지 태워먹은 한나라당을 넘어 대한민국은 전진한다고.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