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 10대 탈학교생
왕따 동영상 파문이 일었을 때 난 무관심했다. 얼마 뒤 사건 학교의 교장이 자살했다는 소식조차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어느 날 왕따 가해 학생의 인터뷰를 접하고 비로소 난 ‘어떻게 이런 일이…’ 하며 뒤늦게 놀랐다. “그냥 장난 삼아 재미로 한 것”이라는 그의 말에.
‘패는 패/ 막는 패/ 공부 패/ 돕는 패/ 노는 패’.
이 집단 분류표는 한 초등학교 5학년의 일기에 씌어진 것이다. 분류표에 따르면 학창 시절(이라 해봤자 고등학교 1학년을 중퇴한) 난 공부 패와 돕는 패 둘 사이를 오락가락한 패로 기억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 반 왕따는 얼굴이 못생겼다는 이유로 ‘멍게’라고 불리던 아이와 치아 교정기 때문에 ‘철테’라는 별명을 지녔던 두 여학생이었다. 난 잔인한 가해자도 반항 한번 못하는 멍청한 피해자도 되지 않기 위해 그들의 놀이문화를 적절히 관조했다. 어느 날 ‘패는 패’가 집단으로 몰려와 확성기를 대고 ‘막는 패’에게 온갖 욕설과 성희롱을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난 그 사건을 담임교사에게 알렸지만 이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따돌림은 점점 더 심해졌다.
교내 따돌림이라는 문화현상에 왕따라는 이름이 붙여진 1990년 후반 이전에도 학원 폭력의 피해자는 존재했다. 예전에는 소수의 일탈자가 소수의 약자들에게 폭력을 가하며 은밀한 공간에서 즐기던 쾌락이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즐기는 놀이문화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전의 가해 학생들은 따돌림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죄의식을 느꼈다면, 최근의 따돌림은 재미있는 놀이이고 따라서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압축적 근대화를 지나 90년에 이르러 교실에 ‘개인’이 등장하면서 아이들은 자신의 욕망을 말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하는 동시에 행하기 시작했다. 억압된 교육 현장에서 욕망은 폭력의 행사였고, 그 폭력은 ‘모난’ 아이들을 찾아냈다. 너도나도 따돌림의 가해에 동참하게 된 아이들은 이 장난질을 인터넷에 올려 모두 함께 즐기자고 야바위하기에 이르렀다. 따돌림에 더 이상 죄의식을 지닐 필요가 없는 세대가 ‘장난 삼아 재미로’ 왕따 동영상을 올렸다는 말은 진심일 것이다.
왕따 동영상 파문은 진화한 왕따의 표본인 셈이다. 진화는 교실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일어났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 일부 권력자가 자행하던 약자에 대한 폭력은 이제 우리 모두 일상적으로 대면하고 행하는 문화가 되었다. 왕따 동영상을 두고 피해 학생에 대한 동정과 가해 학생들에 대한 분노를 표하는 우리 모두 ‘다름’의 이유로 인종적·경제적·성취향에 따른 왕따를 행하는 한명의 가해자가 아니던가. 동영상을 올린 가해 학생을 처벌하면 모든 게 해결될까? 아닐 것이다. 그는 누구나 즐기는 문화를 더 많은 사람과 함께 누리고 싶었을 뿐이고, 사실 그 또한 피해자인 셈이다. 그렇다면 서로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현실을 두고 도대체 우리는 누구를 탓해야 할까? 더 이상 핵심을 뒤로 한 채 눈에 보이는 대상에 분노를 토할 것이 아니라, 왕따를 둘러싼 학교와 사회적 음모의 실체를 파헤쳐야 할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왕따 동영상 파문은 진화한 왕따의 표본인 셈이다. 진화는 교실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일어났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 일부 권력자가 자행하던 약자에 대한 폭력은 이제 우리 모두 일상적으로 대면하고 행하는 문화가 되었다. 왕따 동영상을 두고 피해 학생에 대한 동정과 가해 학생들에 대한 분노를 표하는 우리 모두 ‘다름’의 이유로 인종적·경제적·성취향에 따른 왕따를 행하는 한명의 가해자가 아니던가. 동영상을 올린 가해 학생을 처벌하면 모든 게 해결될까? 아닐 것이다. 그는 누구나 즐기는 문화를 더 많은 사람과 함께 누리고 싶었을 뿐이고, 사실 그 또한 피해자인 셈이다. 그렇다면 서로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현실을 두고 도대체 우리는 누구를 탓해야 할까? 더 이상 핵심을 뒤로 한 채 눈에 보이는 대상에 분노를 토할 것이 아니라, 왕따를 둘러싼 학교와 사회적 음모의 실체를 파헤쳐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