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한국영화 ‘스타파워’
등록 : 2004-03-10 00:00 수정 :
1천만 관객시대 접수 노리는 스크린의 강자들… 다시 <실미도> <태극기…>의 신화를 깨뜨릴 건가
글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 사진 <씨네21> 제공
지난달 <실미도>가 관객 1천만명의 고지에 올랐고 <태극기 휘날리며>가 개봉 2주 만에 500만명을 동원하며 맹추격하고 있는 요즘, 한국 영화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새삼 뜨겁다. 두 영화가 수백개의 스크린을 동시 점령하는 것을 지켜보며 다양성의 결핍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타당하지만 감독과 제작사, 배우의 3박자가 어디서 다시 불꽃을 튕길지 기대와 설렘이 더 큰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스타배우들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더욱 각별하다.
스타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건만 스타의 생존력은 영화시장의 판도 속에서 결정된다. 돌이켜보면 <접속>(1997년) 이후 한국 영화의 연출력이 업그레이드되고, 김지운·임상수·이재용 등 젊고 실력 있는 감독들이 속속 작품을 내놓으면서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가 열렸다. 여기에 <초록물고기>, <8월의 크리스마스>, <쉬리>가 흥행·비평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며 ‘한석규 시대’가 꽃을 피웠더랬다. 당시 한석규와 라인업을 지지하던 송강호·최민식·설경구는 약진을 계속하며 ‘포스트 한석규 시대’를 이끌고 있다.
그렇다면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양적인 면에서 폭발적으로 팽창한 한국 영화를 누가 이끌까. 1천만 시대 이후 관객을 사로잡을 주역은 누군가.
# ‘포스트 한석규’ 이끈 연기파 3인방
<태극기…>에서 장동건·원빈이 최적의 캐스팅이었다 쳐도, 영화사 대표들이 여전히 이구동성으로 지목하는 배우는 송강호다. 그는 “이제껏 출연한 작품들에서 가장 고른 타율을 유지하고”(김광수 청년필름 대표), “그가 나왔다고 하면 그 영화에 대한 믿음이 생기며 촬영현장에서 영화의 완성도에 기여하는 몫이 큰 배우”(심보경 명필름 이사)다. 나아가 “송강호 같은 배우가 건재하다는 것은 우리 영화판이 건강하다는 반증”(오기민 마술피리 대표)이기도 하다. 대학로의 가난한 연극배우였던 송강호는 우연히 홍상수 감독의 눈에 띄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조역으로 스크린에 얼굴을 비쳤다. 이후 <넘버3>에서 말더듬 개그연기로 주목받은 그는 <반칙왕>을 통해 주연급으로 당당히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애초 <반칙왕>에 캐스팅됐던 박신양이 사양한 주인공 자리를 꿰찰 때까지만 해도 “송강호는 주연급이 아닌데…”라는 우려가 높았다고 한다. 코믹 연기의 달인을 넘어, <살인의 추억>에서 단순무식한 형사로 스릴러에 윤기를 불어넣었던 그는 올해 <효자동 이발사>로 4월께 관객과 만난다.
송강호와 더불어 개런티 5억원 반열에 서 있는 최민식·설경구는 ‘연기파 배우’로 한국 영화를 짊어지고 갈 대들보. 재기 발랄한 배우들 틈에서 처음엔 빛이 나지 않던 최민식은 날로 농밀해지는 연기로 칭찬이 자자하다. <쉬리>에서 북조선 스파이 박무영으로 거친 매력을 보여주었는가 하면 <해피엔드>에선 잘나가는 부인 옆에서 가계부를 적는 소심남으로, <파이란>에서는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삼류 조폭으로 분했으며, <취화선>에서는 술 없인 살 수 없었던 예술가 장승업의 굴곡 많은 삶을 보여줬다. 지난해 <올드보이>로 다시 한번 “역시 최민식”을 보여준 그는 올 추석 개봉 예정인 멜로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의 주연을 맡았다.
<박하사탕> <오아시스>가 아무리 감독의 영화라 해도 광기 어린 ‘루저’를 섬뜩한 눈빛으로 연기한 설경구가 없었더라면 관객은 박수를 덜 쳤을 거다. <박하사탕>이 나온 뒤에야 “아, <처녀들의 저녁식사>에 진희경과 하룻밤 사랑을 나눴던 그 만화가?”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시대의 희생양 ‘김영호’를 관객의 가슴에 박히게 한 설경구는 이후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단적비연수> <광복절특사> 같은 다양한 장르의 다양한 캐릭터를 맡았다. 출연작의 스펙트럼이 넓은 만큼, 작품을 냉철하게 재기보다는 사람에 이끌려 영화를 고른다는 평도 듣는다.
# 이들은 단지 꽃미남이 아니었다
중국·일본에서도 통하는 얼굴 장동건은 <친구> 이전까지는 뚜렷한 흥행작이 없었다. <패자부활전> <연풍연가> 등에서 잘생긴 외모 그 자체가 캐릭터요 연기였던 그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비평가들을 갸웃거리게 만들더니, 이후 <친구>에서 “고만해라, 많이 묵었다 아이가”와 같은 유행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태극기…>가 일본·미국에서 개봉되면서 그는 미모와 연기력의 양 날개를 갖춘 국제적 배우로서의 비상을 꿈꾸고 있다.
장동건, 배용준, 차승원, 유지태.(왼쪽부터)
지난해 <스캔들>로 청룡영화제에서 ‘신인’배우상을 받았던 배용준은 그동안 TV드라마에서 아름다운 여주인공과 안타까운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남자의 전형으로만 알려졌다. 얄미울만치 능청스럽게 조선의 최고 바람둥이를 연기하는 그를 지켜보며 영화계는 잔뜩 기대를 품고 있다. 오기민 마술피리 대표는 “<스캔들> 이후 배용준 신드롬을 낳을 정도로 그는 연기력과 함께 배우로서의 매력이 차고 넘친다”며 그의 장밋빛 미래를 점쳤다.
모델 출신이기에 늘씬한 몸매와 얼굴이 화제가 된 것은 맞지만 그 출신성분이 연기자 차승원의 성적표에 가산점을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차승원은 TV드라마에서 호평을 받는가 하더니 <세기말> <리베라메> 등의 굵직굵직한 영화에 출연하며 존재를 알렸다. <신라의 달밤> <광복절 특사>에서 코미디배우로 변신한 그는 “제가 출연한 영화들이 다 재미있었다는 건 아시죠?”와 같은 <선생 김봉두>의 홍보 멘트를 날리며 ‘코미디 흥행 보증수표’로 한껏 물이 올라 있다. 현재 김상진 감독과 함께 <귀신이 산다>를 촬영하고 있지만, 그가 앞으로 어디로 튈지는 미지수다. 김미희 좋은영화 대표는 “차승원은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을 택해 거기서 자신감을 얻고 난 다음에, 다음 장르로 이동하는 신중한 배우”라며 “코미디에서 이제 만족감을 느낀 만큼 다른 장르에서 다른 색깔로 승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역시 꽃미남 배우로 시작한 유지태도 눈여겨볼 일.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고작 700만원을 받고 출연했던 그는 <봄날은 간다>로 일약 차세대 주연급의 물망에 올랐다. 지난해 <내츄럴 시티> <거울 속으로> <올드 보이> 등 부지런을 떨었으나 <올드 보이>를 제외하곤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 “의욕만 앞서 영화 선택이 중구난방”이라는 비판을 듣는 유지태는 꽃미남 아이돌 스타에서 ‘배우’로 가는 험난한 과정을 몸소 보여줬다. 홍상수 감독의 신작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주연을 맡은 그는 올해엔 저예산영화 제작자로 나서 단편영화도 직접 연출할 계획이다.
# 여배우가 없다고? 나는 예외랍니다
차승재 싸이더스 대표는 “충무로에서 25명 안팎의 주연급 배우군을 따져보면 남·녀 비율이 3 대 1 정도라고 말한다. 영화계에서 얼추 주연급 여배우로 꼽히는 이들은 전지현·장진영·이영애·전도연·김하늘·손예진 정도. “여배우들의 수도 적지만 여배우들의 자리도 궁색하다. 심보경 명필름 이사는 “<실미도>와 <태극기…>의 흥행으로 앞으로는 당분간 남성 영화가 득세할 것이다. 그만큼 여배우를 위한 영화는 폭이 좁다”고 말한다.
전지현, 장진영, 이영애, 전도연.(왼쪽부터)
여배우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전지현이란 존재는 특별하다. “한반도를 넘어 범아시아적으로 각광받는” 전지현은 CF 이미지를 채 벗어나지 못했는데도 ‘정상의 배우’다. <엽기적인 그녀>로 싱싱한 생명력을 스크린 가득 뿜어냈던 그는 <4인용 식탁>에서는 완전히 다른 어둠의 인물을 연기했다. 대중은 전지현을 보기 위해서라도 ‘아동유기’ 같은 불편한 소재를 다룬 이 영화를 보러 몰렸다. <4인용 식탁>을 제작한 영화사 봄의 이유진 PD는 “처음엔 전지현 파워를 과소평가해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지 않은 게 후회된다”고 말한다. “관객이 78만명가량 들었는데, 당시 한 언론에는 전지현의 관객동원력을 66만명 정도로 추산했다.”
<대장금>에서 한껏 기를 모은 이영애의 행보도 주목받고 있다. 충무로에서 캐스팅 0순위에 올라 있는 그는 정극 연기자로서의 이미지를 꾸준히 관리해가며 탄탄히 길을 닦았다. 신작 <여선생 대 여제자>의 시나리오를 받아둔 그가 앞으로 코미디에서도 빛을 발하며 연기폭을 넓힐지 궁금하다.
여기에 <반칙왕>의 조연으로 출발해 지난해 <싱글즈>의 성공으로 단박에 주연급으로 뛰어오른 장진영도 보탤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비행사 박경원의 일생을 다룬 <청연>이 성공한다면, 충무로는 그를 A급 배우로 확실히 대접할 것이다. 이 밖에 김하늘·김선아·김정은의 로맨틱 코미디 삼총사의 자리도 당분간 유지될 전망이다.
# 위기의 한석규, 어디로 갈 것인가
지난해 5월 영화잡지 월간 <스크린>에서 1993~2003년 10년 동안 배우 흥행 파워 순위를 따졌을 때만 해도 그는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그러던 그가 3년 만에 컴백한 영화 <이중간첩>의 흥행 실패로, 그야말로 ‘망가졌다’. “쉬는 동안 급변하는 영화시장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연기 스타일이 달라진 관객 취향과 맞지 않는다” “시나리오를 너무 재다 기회를 놓쳤다” 영화제작자들은 갖가지 분석을 내리며 한석규 시대는 갔다고 입을 모으면서도 그의 역할에 대해서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한석규의 재기가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한석규가 주연을 맡고 형 한선규가 제작하는 스릴러물 <소금인형>이 투자자와의 문제로 잠정 중단된 상황이다.
한편, 제작자들은 근육질의 남성 영화들 속에서도 아기자기한 로맨틱 코미디의 행진은 계속된다는 전제하에 꽃미남 배우들의 호황도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제작진의 기획력이 중요하고 적은 자본으로도 만들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는 그만큼 새로운 얼굴을 공급할 수 있는 안전한 통로이자, 꽃미남들이 신고식을 치르기 좋은 장르다. 강동원·조한선·김래원·조현제 등이 기대되는 아이돌 스타로 꼽힌다.
오르고 솟는 스타들의 몸값 [도대체 얼마나 할까]윤여수/ <굿데이신문> 기자 # 충무로 풍경 1 지난 2001년 여름의 어느 날. 한 톱스타급 여배우가 한 영화에 출연하면서 2억원이 훨씬 넘는 개런티로 여배우 출연료 기록을 세웠다는 사실이 신문에 보도됐다. 그와 함께 한 중견 여배우가 이미 출연키로 결정했을 즈음이었다. 하지만 이 중견배우는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고 말았다. “내가 후배보다 뭐가 모자라서 출연료가 이 모양이냐”며 매니저를 통해 제작사쪽에 항의한 뒤였다. # 충무로 풍경 2 2004년 2월의 어느 날. 지난 몇년 동안 흥행작을 내지 못해 한동안 영화를 제작하지 못했던 한 영화 제작자는 최근 한편의 영화 제작을 끝내 포기해야 했다. 톱스타급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건넨 뒤 고액의 출연료는 물론 제작사 지분의 15%를 지급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제작자로서는 자신의 수익을 거의 포기하는 수준의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 배우는 거절했다. 그 정도의 조건은 다른 영화 제작사와 협상을 통해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주연급 배우 출연료에 얽힌 장면들이다. 영화 제작사 혹은 제작자들의 고충이 그대로 읽히는 대목들이기도 하다. 배우 출연료가 이제 영화 제작 혹은 투자 여부를 결정짓는 수준이 되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톱스타급 배우들의 출연료 인상은 영화 제작비 상승의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영화제작사 싸이더스의 노종윤 이사는 “90년대 중·후반에 비해 제작비는 2.5배 정도 증가했다. 제작비 가운데 배우들의 출연료 비중은 당시나 지금이나 비슷하지만 출연료의 절대적인 액수는 세배 이상 뛰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지난 1990년 영화 <베를린 리포트>에 출연한 강수연이 처음으로 출연료 1억원 시대를 연 이후 주연급 배우들은 끊임없이 ‘몸값 경쟁’을 벌여왔다. 이병헌은 최근 영화 <누구나 비밀은 있다>에 출연하면서 5억원을 받아 최고 수준의 개런티를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남극일기>에 출연키로 한 송강호는 4억8천만원에 제작 지분의 일부를 받기로 했고 지난해 1월에 개봉된 <이중간첩>의 한석규는 4억5천만원+α, 유오성은 <별>에 출연하면서 5억원의 출연료에 흥행에 성공할 경우 추가 개런티를 받는 조건을 내걸기도 했다.
여배우들의 경우 전도연과 김정은이 약 3억5천만원선으로 알려졌고, 신은경은 <조폭마누라 2>에 출연하면서 4억원을 손에 쥐었다. 전지현은 아예 출연료 수준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지난 2001년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 출연할 당시 받은 1억6천만원에 비하면 천정부지로 출연료가 뛰었음을 보여준다. 최근에는 하지원이 한 영화에 출연하면서 4억원을 받았다는 소문까지 나돌기도 했다. 조연급 중견 배우들이 1억원에서 1억5천만원 정도의 출연료를 받는 것에 비해서도 이들 톱스타급 배우의 출연료는 상당히 높은 셈이다.
이처럼 제작비 대비 15~20%의 비중을 차지하는 배우들의 출연료 인상 요구에 제작사들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스타가 흥행을 보장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성경제연구소가 내놓은 ‘스타파워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한명의 스타가 영화 관객의 11% 정도를 동원하는 효과가 있다.
여기에 인센티브(흥행 성과에 따른 보너스) 혹은 흥행 여부에 따라 ‘관객 몇명당 얼마’를 받겠다는 식의 러닝개런티 요구는 이제 제작사나 전체 영화 순수익의 일부라는 식의 지분 요구로 변해 배우들에게 돌아가는 돈이 그만큼 많아지고 있다는 게 충무로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한 영화 투자·배급사의 관계자는 “영화가 흥행해 제작사가 단 한푼이라도 벌게 되면 그 가운데 일부를 나눠가질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 “그만큼 제작사들은 영화가 흥행해도 가져갈 것이 별로 없는 상황이 됐다. 투자사에 ‘고통 분담’을 제안하지만 투자사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