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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출판- 내일은 늦으리, 꿈을 걸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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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3-03 00:00 수정 : 2008-09-17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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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삶을 조각 맞춰온 한 백인 페미니스트의 일생… 흰머리 휘날리며 지구촌 여성에 연대의 손 내밀어

권혁란/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전 편집장

『아름다운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 케롤린 하일브런 지음, 윤길순 옮김, 해냄 펴냄.

“학교를 졸업한 후엔 뭐할 거지?”

“결혼할 거예요!” “결혼한 후엔?” “결혼한다니까요!”

“맙소사, 내가 마누라 양성소 선생인 줄 몰랐어….”

곧 개봉되는 영화 <모나리자 스마일>의 예고편 대사 중 한마디다. 사전 정보라곤 미국의 어느 손꼽을 만한 여자대학 선생님의 여성교육에 대한 꿈과 여대생들이 곧 맞닥뜨릴 미래의 좁은 길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밖에 없지만, 저 진부하디 진부한 60년대식 몇 대사만 듣고도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거린다. 감동받을 준비가 완벽히 되어 있는 탓이다. “자, 걸어가면서 천천히 봐요. 우리에게 다른 시각을 선사할 거예요” 같은 대사들(마치 <죽은 시인의 사회>처럼 성장통을 앓는 아이들의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과 때론 단호하게 때론 자애롭기 그지없는 교사와의 감정적 교류들)을 들으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누군가에게 새롭게 사물을 보는 방법, 꿈을 꾸는 방법, 다르게 걷는 방법을 배우고 싶을 만큼 간절하다. 누가 나에게 무얼 어떻게 할 거냐고 다시 물어주었으면… 누가 나의 손을 잡아 이끌어주었으면… 하고 다시 꿈꾸게 된다.


아름다운 자유를 선물한 ‘다른 삶’

<아름다운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읽는 것은 영화 <모나리자 스마일>을 미리 보는 것 같다. 오래 전 선택받은 소수였던 여대생들이 그 영민한 눈빛과 ‘브릴리언트’한 머리로 교육을 받고 사회에 뛰어드는 첫날 졸업식 축사로 “이제 아가씨들은 오늘 다른 곳에서 졸업하는 명문대 남학생들의 짝이 될 만한 훌륭한 여성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는 이야기는 실로 웃으면서도 눈물이 난다.

정·재계 혹은 문화계를 움직이는 훌륭한 남성들의 옆구리에 끼고 다니기에 맞춤한 훌륭한 아내로서의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일단은 의심 없이 걸어 들어가는 그 길을 가지 않은 여자, 내 눈으로 본 것을 내 눈으로 쓰고 말하겠다는 욕망을 가진 여자, 그리고 그것을 이룬 여자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지난해에 한국엘 왔었다. 우스갯소리일지언정 페미니즘 잡지로 독일에 <엠마>가 있고 미국에 <미즈>가 있다면 한국엔 <이프>가 있다는 농담을 즐겼던 나는 남이 들으면 웃겠지만 그에게 묘한 동일시를 했음을 고백한다.

앨리스 워커, 글로리아 스타이넘, 현경(왼쪽부터). 각기 다른 피부색깔처럼 이들이 내세우는 페미니즘의 ‘색깔’도 다르다.
자신의 시각으로 사건을 보고 그것을 글로 쓰고 의견을 말하는 것이 단지 “짹짹거리는” 또는 “말하는 강아지” 정도로 폄하되는 시절을 보낸 글로리아가 한국의 내로라 하는 여기자들에게 당신들이 하는 말이, 당신들이 사는 삶이 많은 여성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할 땐 마음속에서 박수가 우우 하고 터져나왔음도 고백한다. 단둘이 마주 앉을 수 있었던 천금 같은 시간에도(그렇게 하고 싶은 말이 잔뜩이었는데도)기껏 글래드투미트유밖엔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꿈을 읽으면서, 그녀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날마다 그녀는 조금씩 더 걸었다. 처음에는 1마일을 갔다 집에 돌아오고, 그 다음에는 2마일을 갔다 집에 돌아오는 식으로. 그러다 어느 날 그녀는 그냥 계속 걸어갔다”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란 영화 주인공 홀리 골라이틀리의 떠남의 방식과 꿈꾸는 방법을 좋아했다는 글로리아의 글에 나는 학생처럼 밑줄을 그었다. 저 짧은 글 속에 담긴 단어를 보라. 꿈, 길, 걷기, 시작했다, 처음, 더, 그냥, 계속, 걸어갔다. 한 인간의 성장에 대한 모든 도정이 들어 있지 않은가, 말이다.

평전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이 책도 약간은 도식적으로 꿰어맞춘 듯한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난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고, 글을 쓰고 싶었지만 불안정한 결혼으로 꿈을 접고 평생 돈 걱정을 하면서 신경쇠약으로 늙어간 ‘다락방의 미친 여자’ 같은 엄마가 있었다. ‘엄마처럼 되지 않겠다’고 무의식적으로 도리질을 쳤던 소녀가 있었고, 사랑에 빠져 하마터면 결혼을 하려던 처녀아이가 있었고, 진보적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에 투신했던 여기자가 있었고, 남성이 무시하고 염두에 두지 않는 여자들의 생각과 삶을 펼쳐 보일 장이 필요하다고 느낀 여자가 있었다. 이건 그 여자가 그 길을 그렇게 걸어갔다고, 살펴보면 한 인간이 그렇게 살도록 아주 오래 전부터 그러그러한 상황과 마음이 있었노라고 설명해가는 글이지만 읽기가 지겹지는 않다. 글로리아가 성공 스토리처럼 화려하게 삶을 마감한 것이 아니라 삶의 순간순간을 정해진 도식과는 엇갈리게 걸어갔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하얗게 센 은빛 머리를 흩날리며 아주 에너지 넘치고 자유롭게, 남다르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그의 삶은 좀 “깬다”. 아름답고 섹시한 여자가 페미니즘을 떠들어대고, 백인 부르주아 엘리트 여성이 노동자와 흑인과 아무렇지도 않게 연대하고, 많은 남자들과 연애를 일삼고, 결혼을 하지 않고 버티다가 환갑이 넘어서야 한 남자와 파트너십으로 맺은 관계를 맺는다. 칠순이 넘었어도 사방팔방으로 여행을 다니고 손을 잡길 원하는 여성들의 손을 맞잡는다. 신기하고 아름답다. 갈등과 반목을 두려워하는, 그래서 실수를 연거푸 되풀이했던 순진한 여성, 강연을 두려워해 도망 다녔다던 그 여성이 했던 말들을, 그 날카로운 필봉(무척 남성적인 언어다)의 느낌은 아직도 새롭다. 놀랍다.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왜 식사 때가 되면 나만 무엇을 해서 함께 먹어야 하는가를 머리털 빠지게 고민하는 것이 억울하고 억울해서 얼굴이 벌게지고야 마는 나에겐 현명하다 못해 미워 죽겠을 만큼 얍실하고 정갈하게 그 모든 함정과 허방을 피해간 그의 삶이 어쩌면 나를 조금은 다르게 살게 해줄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흑인 친구 앨리스 워커와 더불어…

그런 책들만 출판된 탓인지 한국의 페미니즘은 서양 백인 중산층 여성들의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오명을 아직도 뒤집어쓰고 있다. 그러나 퓰리처상을 받은 <컬러 퍼플>의 흑인 여성작가 앨리스 워커는 어떤가. 영화화한 그 이야기는 우피 골드버그와 오프라 윈프리가 자매로 나와 흑인여성 삶의 피맺힌 색깔, 즉 누군가에게 죽도록 구타당해 생긴 멍자국 같은 보랏빛 색깔의 삶을 보여주었다. 앨리스 워커의 페미니즘은 글로리아와 돈독한 자매애를 나누면서 <미즈> 일을 함께 했지만 색깔이 좀 다르다. 앨리스 워커는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미묘하게 엘리트 부르주아 백인여성의 느낌이 있는 것에 착안해 우머니스트(Womanist)란 말을 썼다. 그리고 여성성을 표현하는 페미니즘의 색깔, 즉 페미니즘이 연보랏빛 라벤더 색이라면 흑인여성의 페미니즘, 즉 우머니즘(Womanism)은 퍼플 즉 자줏빛이라고 새롭게 명명했다. 너는 나와 다르다고 줄을 긋고 밀어내는 게 아니라 따스하게 껴안되 너와 나는 조금은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다.

앨리스 워커의 책은 이미 <여인들의 신전>과 <은밀한 기쁨을 간직하며>로 나왔고 곧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가제)란 책이 나온다. 그는 책에 쓰기를 글로리아가 들었던 어이없는 졸업식 축사 대신 갓 졸업하는 여대생들에게 이런 시를 선물한다. “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 차라리 버림받은 자가 되어라, 혼자서 걷는 것을 즐겨라”라고. 나는 자줏빛 혁명으로부터라는 크레딧이 달려 있는 이 시를 배타적이고 소모적인 관계에 매달리는 여자가 되지 말고, 홀로도 충만한, 아니 넓고 깊게 남들과 똑같지 않은 자기 길을 걸어가면서 사람들 속에 자유롭게 서 있으라는 잠언으로 새겨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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