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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자객, 이데올로기에 무릎을 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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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2-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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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환 /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중국 정부가 전폭적으로 지원한 장이모 감독의 영화 <영웅>은 이른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원래 사마천의 <사기열전> 가운데 ‘자객열전’의 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형가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결정적으로 변용시키는 방법으로 진시황의 무자비한 통일 과정을 정당화하고 있다.

중국의 ‘통일적 다민족국가’ 이데올로기에 충실히 기여하고 있는 영화 <영웅>의 한 장면.
<사기열전>에서 형가는 진왕의 통일과 통일 과정을 저지하기 위해 암살을 기도한다. 후세 사람들은 진시황의 암살에 나선 자객 형가의 이념적 배경을 진나라와 진시황의 ‘반문명’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하곤 했다. 따라서 실제 역사에서 형가는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최후까지 노력하지만 실패해 처절하게 죽는다. 이와 달리 <영웅>에서는 주인공의 거사가 거의 성공하는 듯하다가 막판에 시황제의 이념에 설파돼 암살을 포기하고 죽음을 택하는 극적 반전으로 이어진다. 시황제는 묻는다. “지금 통일을 대신할 가치 있는 것이 있는가? 나를 여기서 죽이면 과연 백성들에게 영원한 평화가 오는가? 그렇다고 확신한다면 날 죽여라.” 그러면서 검을 자객에게 내던져 맡긴다. 자객은 이 물음- 통일적 다민족국가를 절대화하는 이론- 에 무릎을 꿇고 검을 거둔다.

2003년 1월 개봉한 이 영화는 1년 뒤인 지난 1월 춘절 연휴기간의 황금시간대에 중국 국영 텔레비전을 통해 재방영됐다.

무협지로 동양권에서 폭발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김용의 작품들도 사실상 ‘통일적 다민족국가’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게 기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 <사조영웅문>을 비롯해 <천룡팔부> 등 많은 작품들이 다민족끼리의 충돌을 거쳐 궁극적으로 화합에 이르는 과정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몽고와 금나라, 남송 등이 각축을 벌이는 <사조영웅문>에서 주인공 곽정은 몽고에서 자라 결국 몽고와 싸우는 남송의 영웅으로 부상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길러준 칭기즈칸과는 결정적으로 적대하지 않고 화해를 이룬다. 역시 거란과 대리국 등 소수민족과 한족의 애증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천룡팔부>에서 거란인 주인공 소봉은 전쟁을 막기 위해 마지막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길을 선택한다. 김용의 흥미진진한 무협 공간 속에서 개인과 개인은 원수일 수 있지만, 민족 대 민족의 갈등은 절묘하게 원한 관계로부터 비껴나고 있다.

바로 이런 이념적 지향성 때문에 <영웅>과 김용은 중국 정부쪽으로부터 환대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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