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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마당’과 ‘무대’라는 다른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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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1-1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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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간의 가면 비교>

문헌상으로 나타난 우리나라 가면극의 기원은 신라시대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최치원의 ‘향약집영’에는 “황금탈 쓴 그 사람이, 구슬채찍 휘두르며 귀신 부리네. 빠른 걸음, 조용한 모습으로 운치있게 춤추니, 너울너울 춤추는 붉은 봉황새 같구나”라고 적혀 있다. 신라시대의 가면으로는 처용가면이 유명하다. 또한 백제의 가면극에 대해서도 기록이 남아 있다. <니혼쇼키>(日本書記)에 의하면, 기원후 612년 백제의 미마지가 일본에 가면무언극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시원이 높은 우리나라의 가면이 일본에 비해서 왜 세계적으로 덜 알려졌을까? 경제력의 차이, 홍보 부족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 가면극의 풍습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면극이 끝나면 가면을 태우는 풍습이 있어 남아 있는 탈이 많지 않은 것이다. 특히 나무로 만든 가면은 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가면극, 즉 탈놀음은 풍성한 가면무 문화를 자랑한다. 전국 각지에서 탈놀음이 없는 고장이 없었다. 현재는 서울지역에는 양주별산대와 송파산대가 전해지고 있고, 경상북도와 강원지방에는 하회와 강릉의 것이, 황해도 지방으로는 봉산·강령·은율의 가면무가, 경상남도 해안지방 것으로는 통영·고성·수영·동래·가산의 것이 남아 있다. 여기에 ‘북청사자놀음’, ‘제주입춘굿’, ‘양주소놀이굿’ 등 짐승탈을 쓰고 노는 놀이까지 감안하면 탈을 사랑하고 탈춤, 탈놀이가 성행한 민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탈놀음은 언어가 중요하게 쓰인 극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대개 동아시아에서 가면극은 무언어극(無言語劇)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탈놀음은 걸쭉한 사설이 빠지지 않는 특이한 탈놀음이다. 주제 역시 양반에 대한 조롱, 파계승에 대한 풍자, 남녀간의 삼각관계에서 오는 갈등 등 당시 서민생활이 그대로 반영된 생생한 것들이다.

또 한 가지 우리나라 가면극의 장점은 어디서나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넓은 마당이 있으면 그대로 탈판이 된다. 그만큼 수용자와 친숙하게 섞이는 장르가 탈놀음이다.


이에 비해 일본의 대표적인 가면무인 노(能)는 노무대(能舞臺)라는 특수한 무대를 필요로 한다. 노는 14세기 간아미와 간아미의 아들 제아미라는 두 배우에 의해서 정형화되었다. 하회탈이나 미얄할미탈 등 우리나라 탈이 풍부한 표정을 지니고 있는 반면, 전통적인 노가면은 표정이 없다. 이 무표정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 배우의 역할이다. 또한 감정의 변화를 나타내기 위해서 탈을 바꿔쓰기도 한다. 탈을 바꿔쓰면서 드라마틱하게 변신하는 대표적인 노는 도조지(道場寺)다. 기요히메라는 아름다운 여성은 안친이라는 승려를 사랑한다. 그러나 안친이 자기를 피해 도망가자 그만 분노에 차서 괴물이 되고 만다. 이 과정에서 기요히메는 오미온나 가면(나이든 여자가면)에서 한냐가면(뱀귀신 가면)으로 가면을 바꾼다. 이 이야기는 다른 가면무와 함께 일본 내에서 만화나 연극의 모티브로 많이 애용되었다. 즉 가면무가 현대 예술의 영감의 원천으로 이용된 것이다.

일본 역시 풍부한 가면무 문화가 있다. 노도 가미노, 슈라노, 가쓰라노, 자쓰노, 기치쿠노 이렇게 다섯 가지가 있고, 노를 패러디하기도 하는 익살스러운 가면극 교겐, 민간신앙 무속춤 기가쿠, 황실의 가면극 가구라 등 다양한 가면문화를 자랑한다. 일본은 이처럼 다양한 자국의 가면문화를 홍보하기 위해 대영박물관에 가면을 기증하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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