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화가 김정헌씨가 일상의 눈으로 재구성한 근대 백년… 동학혁명에서 촛불집회까지의 유머스런 역사화들
1997년 4번째 개인전을 마치고 나서 그는 정말 상처를 받은 모양이었다. 전시기간 내내 관객이 너무 없어 애를 끓였던 그는 막판엔 ‘황신혜밴드’를 불러 구성지게 노는 것으로 마감했다고 한다. ‘황신혜밴드’에 정말 황신혜가 있는 줄 알고 왔던 사람들까지 어울려서. 그 뒤 한참 동안 그는 지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젠 그림 안 그리겠다, 전시회도 안 할 거다.”
이후, 정말 그와 마주친 곳은 인사동 화랑가가 아니라 시민단체의 행사 뒤풀이 자리 같은 곳이었다. 문화연대 공동대표나 총선시민연대의 상임공동대표 같은 직함을 달고 분주히 활동하는 그를 지켜보며 가평 두밀리 작업실은 잠정적으로 폐쇄한 줄 알았었다.
오래된 기억을 오늘의 일상으로 구현 그랬던 김정헌(58·공주대 미술교육과 교수)씨가 7년 만에 다시 전시회를 연다(3월1일까지 인사아트센터, 02-736-1020). ‘백년의 기억’이라는 주제로 우리의 근대사 100년 가운데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10가지 장면을 재해석한 그림들을 내놓았다. 민중미술이 꽃을 피운 1980년대 그는 “대중과의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은 창작 행위는 존재할 수 없다”며 ‘큰그림’이라는 슬로건을 통해 공공미술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역설했다. 공주교도소 운동장 담장에 그린 30m짜리 벽화 <꿈과 기도> 같은 작품으로써 그는 ‘큰그림’을 실천했다.
그 뒤 다시 10년. ‘혁명’ 대신 ‘일상’이, ‘사회’보다는 ‘개인’이 화두가 된 1990년대 그가 새로 출발한 지점은 ‘작은그림’이었다. 1997년 전시회에서 그는 가로세로 60cm의 작은 나무판 100장에 그림을 그려 벽면을 채웠다. 이번에 그가 서 있는 지점은 ‘큰그림’과 ‘작은그림’의 경계가 아니다. 그림 안에 또 다른 이야기를 숨긴, 그림 속 그림이다. 그림 속 주인공들은 그림틀 저 너머로 ‘하이퍼링크’돼 있는 것이다.
우리 역사 100년의 출발로 삼은 동학혁명을 보자. 교과서에 실린 사진을 통해 잘 알고 있는 전봉준의 서울 압송 장면이다. 김정헌씨는 이 사진을 회색 톤의 유화로 살려내고 사진 속 가마꾼을 클로즈업한다. “승교 앞채잡이로 교대됐을 때 총알도 손으로 움켜쥔다는 녹두장군이 어느 순간 내 목을 조르지 않을까 걱정될 때가 많았다.” 그림 옆에는 김정헌씨가 상상해 지어낸 가마꾼의 사연이 글로 적혀 있다. 그것은 동학혁명의 좌절에 대한 민중의 슬픔이나 쇠락해가는 국운에 대한 염려와는 거리가 멀다. 가마꾼은 당시 처음 보는 신식 물건인 주름막이 달린 뷰카메라가 그저 신기하고, 조명이 펑 터질 때 눈앞에 오색구슬 같은 것이 아롱대는 것이 낯설다. 화가는 이 한장의 사진을 놓고, 동학혁명의 정치적 의미를 따지는 대신 ‘개인’에게 ‘근대의 씨앗’이 싹트는 장면을 포착한다.
‘교과서 사진’속에서 ‘개인 내면’포착
그림 속에서 시간은 계속 흐른다. 바지저고리에 러시아제 소총을 든 허술한 행색의 의병들을 지나, 창씨개명을 신청하러 줄을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스쳐, 해방을 맞아 독립운동가들이 서대문감옥에서 나오는 장면까지 이어진다. 화가의 붓질을 통해 그림 속에서 ‘호명’된 인물들은 동학교도였던 아버지를 따라 의병에 가담한 어린 소년부터 일본 고관의 첩 노릇을 하는 누이, ‘빨갱이 처남’을 은근히 경계하는 현실적인 아저씨까지 다양하다. “내가 고른 장면들은 주로 역사 교과서에서 쓰인 사진들로, ‘국민국가’의 핵심적 도상이다. 나는 이 이미지에 군중으로 담겨 있는 개인들의 내면세계를 조명하고자 했다.”
개인의 기억에 초점을 맞췄기에 역사의 풍경은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유신시대 긴급조치 위반으로 재판받는 ‘나’는 화상으로 일그러진 서승씨가 검은 안경을 쓴 것을 보고, 박정희의 검은 선글라스를 떠올린다. 그 뒤 ‘나’는 밤마다 검은 안경의 남자가 내는 ‘유신의 소리’에 시달리고, 화가는 ‘나’의 꿈속처럼 어지러운 내면을 <박정희와 유신이 내던 소리>라는 그림에 담았다. 금남로에서 벌어진 광주항쟁의 총격전 장면을 그린 <5·18광주민주화운동과 난초>도 마찬가지다. 시가지 전투가 벌어지는 살벌한 풍경에 느닷없이 난초가 덧그려져 있다. 난초의 주인은 5·18 때 휴교령이 내려져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내던 대학생이다. 당시 들리던 흉흉한 소문과 함께 어느 날 갑자기 난초도 벌레가 끼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학생도 살아남았고, 난초도 살았다. “역사의 기억은 세포에 박혀 있는 것”인가. 관객들은 글과 그림을 번갈아 보면서, 난초의 꽃향기 속에서 5·18의 피비린내를 떠올리게 된다. 동학에서 시작한 근·현대사 10장면은 2002년 효순이·미선이 추모 촛불집회가 열렸던 시청 광장에서 마감한다. 6·10항쟁의 현장에 서서 화가는 “한열이를 살려내라”와 “미선이 효순이를 살려내라”는 함성 사이를 오간다. 집회에 참가한 어린 여학생들의 머리핀을 지켜보며 새로운 희망을 예감한다. 마지막 그림 <6·10항쟁과 2002년의 시청 광장>을 수놓은 꽃핀들은 김정헌씨가 품은 ‘희망의 씨앗’인 셈이다.
김정헌씨가 내세운 그림 속 주인공들은 역사의 현장에 있되, 역사의 무게에 억눌리지 않는다. 마치 수업시간에 딴생각을 하는 아이들처럼, 만세를 외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문단속을 잘 하고 나왔는지 염려하는 식이다. 근엄한 기록화 속 인물들의 엉뚱한 생각을 끊임없이 늘어놓은 글을 읽다 보면 절로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그래서 화가의 시선은, 한편으론 역사를 해석하는 새로운 태도와도 닮아 있다. 딱딱하고 엄숙한 정치·사회사 대신 일상의 미시사를 통해 시대의 전모를 가다듬어보려는 최근의 학문적 노력처럼, 김정헌씨는 국가-사회-개인을 묶는 고리 속에 보이지 않는 틈을 주목한다. 개인은 시공을 벗어날 순 없지만, 단순히 시대의 수동태로 살아가지 않는다. 사회의 명분과 갈등 또는 공존하는 욕망을 품은 채 살아간다.
역사의 무게에 눌리지 않는 주인공들
이런 주제를 전달하는 데 있어 김정헌씨는 ‘교육자’의 태도를 잃지 않는다. 마치 게임을 벌이듯 화가는 그림 속에 감춰진 이야기를 풀어내어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지만, 곧 그림 옆에 붙은 글을 통해 그림 속 세계로 친절하게 안내한다. 마치 이미지 읽어내기 같은 훈련과 비슷하다. 그는 20년째 예비 미술교사들을 길러내는 사범대학에 근무하고 있다. 그는 미술교사 임용고시에서 아직도 석고데생과 같은 실기시험을 본다는 데 분노하고, 실기 위주로만 진행되는 미술교육에 반대한다. “아직도 미술시간을 떠올리면 지긋지긋한 그리기 숙제, 잡다한 준비물에 치를 떠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학생들에게 무조건 그림만 그리라 하지 말고, 그림을 읽는 훈련을 시켜야 한다. 그림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인지하는 시각문화 교육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김정헌씨의 유머러스한 역사화가 미술교육의 텍스트이기도 한 까닭이다.
7년 만에 그가 다시 그림을 선보인다. 교도소 운동장의 ‘큰그림’을 그리던 민중미술가는 이제 ‘작은그림’ 안에서 개인의 내면을 속삭이며 ‘백년의 기억’을 되살린다. 유머러스한 역사화로 근대를 재생시킨 그의 이미지들을 만나보자. |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만세시위에 참가한 아낙네의 시선으로 바라본 <반지와 3·1독립만세>.
오래된 기억을 오늘의 일상으로 구현 그랬던 김정헌(58·공주대 미술교육과 교수)씨가 7년 만에 다시 전시회를 연다(3월1일까지 인사아트센터, 02-736-1020). ‘백년의 기억’이라는 주제로 우리의 근대사 100년 가운데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10가지 장면을 재해석한 그림들을 내놓았다. 민중미술이 꽃을 피운 1980년대 그는 “대중과의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은 창작 행위는 존재할 수 없다”며 ‘큰그림’이라는 슬로건을 통해 공공미술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역설했다. 공주교도소 운동장 담장에 그린 30m짜리 벽화 <꿈과 기도> 같은 작품으로써 그는 ‘큰그림’을 실천했다.

<광주 5·18과 난초> 앞에 선 작가.(류우종 기자)

김정헌씨의 그림은 ‘시각 이미지 읽기’의 교육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다. <장수하늘소, 파리, 그리고 의병>을 감상하는 관객들.(류우종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