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같은 ‘미제’ 작품 생산하는 ‘한양레파토리’ 최형인 대표… 전용극장 생겼지만 고민은 계속된다
글 오지혜(영화배우) ·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그녀는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들을 주축으로 이뤄진 극단 ‘한양레파토리’의 여수장이다. ‘92년, 학교에서 4년 내내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제자들을 위해 ‘비빌 언덕’을 마련해주겠다고 극단을 만들었다. 그 뒤 10년이 넘는 동안 박광정·설경구·권해효·전수경 등 스타연극인을 배출해내고 공연을 올릴 때마다 항상 화제를 몰고 다닌 그녀와 그녀의 극단이었지만 그들의 비빌 언덕 역시 다른 수많은 극단들과 마찬가지로 소프트웨어만 있을 뿐 하드웨어인 극장의 부재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다 지난해 그들에게 산타클로스가 나타나서 덜커덕 극장을 지어줬다. 그것도 번듯한 대학로 자리에. 그 산타클로스는 그녀가 천직으로 몸담고 있는 한양대학교의 김종량 총장이었다.
번안과 창작의 한계를 유쾌하게 뛰어넘다
기적과도 같은 선물이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대에 인간의 영혼을 살찌게 하는 예술, 특히 연극을 통해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게 이유였다. 로또복권 일등에 당첨된 기분이 이런 것일 거다. 극단 대표나 단원들이 아무리 한양대 교수와 졸업생들로 구성된 극단이라 해도 엄연히 프로 극단일진대 엄청난 재벌도 아니고 대학에서 극장을 마련해준다는 건 요즘같이 너도나도 돈 돈 하는 세상에 기적과도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질투로 가슴이 뛸 정도로 부러운 일이지만 이들의 작업들을 보면 기꺼이 고개가 끄덕여진다. 번역극을 위주로 하던 그녀의 극단은 1980년대 민족극 붐을 타고 창작극 르네상스를 맞이한 1990년대의 대학로에서 항상 시빗거리로 도마에 오르곤 했다. 젊은 시절을 해외에서 공부하며 보낸 그녀로서는 일부러 창작을 피했다기보다 그저 인종·국가·문화를 초월해 좋은 레퍼토리를 선정한다는 것이 기준일 뿐이었기에 섭섭하기도 했다. 물론 나 역시 같은 값이면, 그리고 기회가 한번뿐이라면 나랑 상관도 없는 나라의 얘기와 공감할 수 없는 감수성을 멀뚱멀뚱 구경하기보다는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의 모습, 지금 우리의 모습을 담은 작품을 보고 관객과 그 열정을 공유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좋은 창작품을 공연하면서도 국적 불명의 번역극 투를 쓰는 질 낮은 연기를 보는 것보다는 우리 문화와 조금 차이가 나는 얘기를 할지언정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나 통할 수 있는 감동을 전하면서 정확한 감정 전달과 창작극과 다를 바 없는 대사법을 쓰는 그들의 아니 그녀의 연기법을 감상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창작이라고 다 좋은 작품이 아니며, 번안한다고 만사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잘하면 금상첨화지만 엄청나게 큰 한계를 갖고 있기도 한 것이 문학과 연극대본의 번안인 것이다.
그들은 이 번안과 창작의 한계를 가볍고 유쾌하게 뛰어넘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지금도 간혹 그렇게 공연되는 곳이 있지만, 멀쩡하게 우리말로 공연하다가도 상대의 이름을 부를라치면 어색하게도 “차아~ㄹ스!” 하고 부르므로 다른 말들의 어투도 덩달아 성우가 더빙하듯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 반면 그녀의 배우들은 어차피 이건 연극이고 번안은 불가능하며 자신들이 뱉는 말이 한국어라면 솔직하게 “얘, 철수야!” 하듯이 “얘, 찰스야!”, “마이클아!” 하는 식인 거다.
신선한 충격이었고 그들을 ‘번역극만 하는 해외유학파’라고 흉보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통쾌한 복수였다. 호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신들린 연기, 관객이 울기 전에 자기가 자기연민에 빠져 울부짖는 연기가 ‘리얼리즘’과 얼마나 큰 괴리를 두고 있는지를 그녀는 많은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우리나라 배우들의 연기는 그녀의 제자들로 인해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그런데 왜 관객이 없을까…
극장이 없을 땐 극장만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할 거라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유는 번뇌와 한 몸이기 때문일까? 다른 연극인들에게 뺨 맞을 소리지만 그녀는 지금 행복감보다는 두려움으로 몸서리치고 있다. 그렇게 원하던 극장을 얻었건만 망하지 않고 극장을 유지한다는 것은 ‘집’ 없이 떠돌던 시절보다 몇배로 힘이 들어가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란다. 스타를 모셔다 할 수도 있고, 홍보를 자극적으로 할 수도 있으며, 레퍼토리 선정도 요새 시류에 맞게 바꿀 수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온전히 자신들의 힘으로만 이끌어가야 할 극장이 생긴 뒤에도 극장이 생기기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작업했고 그 결과는 씁쓸했다. 아직 공연 중이니 단언할 순 없지만, 그리고 극장이 생긴 지 얼마 안 된 터라 입소문이 덜 났겠지만 개관기념 공연을 하고 있는 극장엔 빈자리가 많았다.
옳은 생각을 가지고 연극을 만들면 관객은 온다던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고 고백하는 그녀에게 좋은 연극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물었다. “관객 한명한명으로 하여금 잊고 있던 자신의 내면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그녀 말대로라면 지금 공연 중인 <2번가의 포로>와 <트루 웨스트>는 분명 좋은 작품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고 작품도 분명 ‘미제’인데도 ‘국산’같이 느껴지는 그런 작품들이다. 한데 왜 관객이 없을까? 이 극장 역시 ‘돈 놓고 돈 먹기’ 세상인 동시대를 ‘읽지’ 못한 건 아닐까? 프로듀서 시스템을 갖춰야 하는 거 아니냐는 내 질문에 “돈맛을 알고” 일하는 분위기는 자기 정서에 안 맞는다는 거다. 걱정이다.
연극을 하게 된 동기를 물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구원을 위해서라고 잘라 말한다. 인간적이고 착한 영혼들의 얘기를 듣고 보고 감동받고, 그러고서 그 관객의 마음이 착해지는 것이 결국 세상을 구원할 거라고. 관객을 가르치고 선동하는 연극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그런 ‘가열찬’ 연극을 하는 사람치고 훌륭한 이를 별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교조적 편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예전에 어느 민족극 극단 단원이 자기 동료 중에 부르조아가 있다고, 그 사람하곤 일 같이 못하겠다고 억지를 부렸다는 얘길 생각해보면, 가만히 있으면 돈 안 까먹고 잘 먹고 잘 살 텐데 굳이 아이들을 거두고 연극 전용극장을 운영하는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세상에 환원하는 길이라고 믿는 그녀의 영혼이 그 ‘가열차게 민족극을 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연출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며 연기는 하면 행복하지만 꼭 하겠다는 건 아닌 반면, 배우 지망생들에게 연기를 가르치는 일은 자신의 숙명인 것 같다고 하는 그녀에게 최근에 극장 운영이라는 숙명이 하나 더 늘은 셈이다. 아무쪼록 극장에 관객이 많이 들어서 ‘우리의 것’ 이전에 ‘사람의 것’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즐거움을 누리길 바랄 뿐이다.

기적과도 같은 선물이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대에 인간의 영혼을 살찌게 하는 예술, 특히 연극을 통해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게 이유였다. 로또복권 일등에 당첨된 기분이 이런 것일 거다. 극단 대표나 단원들이 아무리 한양대 교수와 졸업생들로 구성된 극단이라 해도 엄연히 프로 극단일진대 엄청난 재벌도 아니고 대학에서 극장을 마련해준다는 건 요즘같이 너도나도 돈 돈 하는 세상에 기적과도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질투로 가슴이 뛸 정도로 부러운 일이지만 이들의 작업들을 보면 기꺼이 고개가 끄덕여진다. 번역극을 위주로 하던 그녀의 극단은 1980년대 민족극 붐을 타고 창작극 르네상스를 맞이한 1990년대의 대학로에서 항상 시빗거리로 도마에 오르곤 했다. 젊은 시절을 해외에서 공부하며 보낸 그녀로서는 일부러 창작을 피했다기보다 그저 인종·국가·문화를 초월해 좋은 레퍼토리를 선정한다는 것이 기준일 뿐이었기에 섭섭하기도 했다. 물론 나 역시 같은 값이면, 그리고 기회가 한번뿐이라면 나랑 상관도 없는 나라의 얘기와 공감할 수 없는 감수성을 멀뚱멀뚱 구경하기보다는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의 모습, 지금 우리의 모습을 담은 작품을 보고 관객과 그 열정을 공유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관객이 자신의 내면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은 최형인씨는 배우지망생들에게 연기를 가르치는 일이 숙명이라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