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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책/ 치자꽃 향기 코끝을 스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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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7-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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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에 젖은 지성들의 정담

서울대 인문대학 2동 3층에는 ‘자하헌’(紫霞軒)이라는 당호를 지닌 교수합동연구실이 있다. 영문·중문·독문·국문학 등 다양한 인문 분야 전공 교수들이 모여 한담과 수담을 나누는 곳이다. 지난 92년 봄부터 이병한 교수(중문학)는 자하헌 한구석의 백판 위에 한시를 한수씩 적어두었다. 조동걸(국문학)·황동규(영문학)·안삼환(독문학)·이병건(영어학) 교수 등은 틈틈이 이곳에 모여 이 교수의 한시 풀이를 들었다. 이 교수는 한시를 풀이한 카드에 당시 교수들의 감상이나 풀이, 시국 이야기 등을 빠뜨리지 않고 메모해 두었다. <치자꽃 향기 코끝을 스치더니>와 <이태백이 없으니 누구에게 술을 판다?>는 이 교수가 6년 가까이 자하헌 백판 위에 소개한 한시에 대한 풀이와, 당시 교수들이 나눈 정담을 묶은 한시집이다.

자하헌의 한시 학생들 가운데 가장 새로운 시에 대한 갈망이 뜨거웠던 사람은 역시 시인 황동규 교수였다. 그는 이 교수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시를 내놓으라 압력을 넣었고, 이 교수는 교수들의 진도를 봐가며 1주일에 1∼2편의 한시를 풀어놓았다. 조교를 자청한 이병건 교수는 ‘석좌조교’라는 별칭을 얻었고, 스스로를 외사씨(外史氏)라는 별호로 부른 조동걸 교수는 이 교수가 소개한 한시의 글자를 바꾸어 ‘패러디 한시’를 지어내기도 했다. 가령 그는 옹조의 ‘달밤’이란 시를 패러디해 “혼탁한 세상 가운데 조용히 앉아/ 홀로 나라 걱정하는 시 한 수 읊누나/ 바다 건너 서양 오랑캐 찾아와/ 무궁화를 밟아 부수네”란 시로 구제금융시기의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당송대의 이백·두보·백거이에서 명청대의 원매·운수평 등에 이르기까지 작품성을 인정받는 고급 한시를 감상하는 재미에 더해, 우리 시대 최고 지성들이 한시의 세계에 젖어가는 과정이 가외의 즐거움을 준다.

●치자꽃 향기 코끝을 스치더니●
이병한 엮고 옮김
민음사(02-515-2000) 펴냄, 각 1만원

이상수 기자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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