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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영화- 고통 껴안기, 그 희망의 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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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2-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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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치료사가 본 작가주의 여성영화 <미소>… 우리는 고통의 흔적을 지울 수 있을까

박경희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 <미소>는 시력을 잃어가는 여성 사진작가에 관한 이야기다. 임순례 감독이 프로듀서를 맡고, 추상미씨가 대본만 보고 노개런티로 출연해 화제가 된 이 영화는 2003년 서울여성영화제 개막작으로 처음 상영됐으며, 밴쿠버영화제·로카르노영화제·토론토영화제 등에 잇따라 초대됐다. 작품이 이룬 성취에도 불구하고 배급이 쉽지 않았던 ‘작가주의 여성 영화’가 드디어 우리 곁에 온다(2월13일 개봉, 서울 하이퍼텍나다·씨네큐브 등). 삶의 위기에 운명처럼 직면한 여성의 내면 세계를 그린 영화 <미소>를 보고, 미술치료사 박승숙씨가 고통에 직면하는 태도에 대해 말한다. -편집자

박승숙/ 미술치료사 · <세상에서 가장 용기 있는 여행> 지은이

미술과 심리학을 공부하고 다시 심리치료로 길을 정할 때까지 내겐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미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할 때, 이미 30대에 들어선 나는 혼란하고 우울했던 20대의 많은 질문들을 정리하며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삶은 고통이라는 것, 그리고 삶에서 우리가 최대한 잘 해볼 수 있는 것은 고통으로부터 배우고 성장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세상의 중요한 개념들에는 정반대의 짝이 있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짝이고, 고통이 있어 행복이 있으며, 혼란은 새로운 질서를 위해 필요하고, 빛과 어둠은 서로를 강화시키는 반쪽이다. 쌍들의 양 측면이 공존할 때 비로소 어느 한쪽이 보증된다는 게 그렇게 배우기 어려운 것이었는지!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오만한 자의식

내겐 그랬다. 나의 20대는 그러한 역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그래서 심한 우울증으로 내 고집 센 거부의 값을 치러야 했다. 답이 내려지지 않을 실존적인 부조리와 모순을 어떻게든 해결해줄 절대적인 답이 어딘가에는 있어야만 했다. 의지가 굳고 자의식이 강했던 난 “이럴 리 없어, 그럴 순 없어, 다른 게 있어야 해”라며 침묵의 시위를 계속했고, 결국엔 고통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기 싫어서 살기도 거부했다. 하지만 결국 내가 비싼 값을 치르고 배운 것은, 생의 ‘어쩔 수 없는 것들(must)’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의 선택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점이 바로 지혜로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똑같이 고통스러운 삶에서도 행복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누는 기준임을 배웠다.

그 뒤 나의 30대 후반기는 자의식의 칼날을 다듬으며 삶에 ‘순응’하는 것을 배워나간 시기다. 치료를 통해 만난 사람들과도 나는 이것만이 변함없는 진리임을 확인한다. 적응이나 패배가 아닌, 성숙된 순응-그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며, 순응을 배워 앞으로를 위해 자기를 준비하는 것 자체가 긴 시간을 요하는 정신치료다. 최소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렇고, 내가 하고 있는 일도 그렇다.

영화 <미소>에서 주인공 소정은 치명적인 실명의 위기 속에서 삶에 순응하며 미소를 익힌다.
<미소>는 오만한 자의식으로 거대한 삶의 흐름 앞에 ‘추락’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모습을 다시 보여주는 것 같다. 영화의 주인공에게 주어진 어쩔 수 없는 것과, 내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어쩔 수 없는 것은 서로 구체적인 모습은 달라도 결국, 하나의 얘기다. 바로 삶에는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열심히 산다 해도 태어난 이상 우리 모두는 언젠가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무(無)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무화되는 시점도 저마다 다르며, 예상할 수 없다. 인과관계가 분명치 않은 것들이 지식 속에 너무나 많고, 잘못하지 않아도 잘못 벌어지는 운명 같은 일들도 많다. 자기의 좁은 인식의 범위 내에서 예견하고 볼 수 있는 것보다 그럴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더 많다. 그래서 주인공은 과학도인 애인에게 그렇게 연구해봐야 “입자의 실체도 발견 못할걸”이라고 말하며, 그는 “우린 인정하잖아”라고 답한다. 그런 그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워한다. “다 맞아.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아.”

‘사유’되지 않는 고통… 프로그램된 행로

사진이라는 전문분야에서 일하는 주인공 소정은 “하나라도 고분고분한 게 없는 황소고집”이자 “잘난 척하고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는 여성이다. 남자친구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가 “시작도 쉽게 하고 끝도 제멋대로”라는 비난을 듣는 그녀는 운명이란 아무리 절묘하더라도 그 역시 우연의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삶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자기 의지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늘 그럴까? 아니다. 사진가에게는 치명적인, 실명의 위기를 가져올 안질환을 선고받은 그녀는 고통 속에 입을 다물고 우울함에 몸을 맡긴다. 밤마다 악몽을 꾸어도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는다. 외로운 불안에 걸맞지 않은 콧노래를 부르면서도 벽에 머리를 찧다가 다시 일어나 일상을 계속한다.

소정에 대해 한 영화전문가는 “그동안 한국영화에서 고통받는 여성은 많았으나 고통을 생각하는 여성은 처음”이라고 평한다. 그럴듯한 이 말이 내겐 오히려 충격이다. ‘쿨’한 것이 좋아, 깊이 느끼고 절망하지 않고 쿨하게 사고하여 쿨하게 헤어나온다는 현대인들. 내 치료실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치료 과정을 어렵게 하는 것도 바로 이 쿨함이다. 고통은 과장되어서도 안 되지만, 미니멀해지지도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오만이다. 고통은 고통스럽다. 고통은 느끼는 거지, 생각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고통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는 있다. 하지만 고통을 쿨하게, 미니멀하게 사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환상이요, 회피다. 거기에선 어떤 진리도 배울 수 없다.

그래서 주인공은 끝까지 조용하게 자기의 고통을 쿨하게 떼어놓고 한계에 도전한다. 이미 시력이 떨어졌는데, “높이 날아 어디든 가고 싶다”는 비상에의 욕구를 갖는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그녀는 경비행기를 몰고 가다 물 위로 추락하고, 뒤집혀진 비행기 몸체에 가까스로 기어올라 등을 굽히고 힘없이 앉는다. 그녀에게 소중한 사진기는 이미 물에 잠겨 있다.

치료사인 내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대사는, 병명을 듣고 애인에게 이별을 고하면서 그녀가 한 말이다. “이렇게 프로그램된 게 나인지, 내가 이렇게 프로그램됐을 뿐인지….” 그녀가 무엇을 ‘프로그램된 것’이라고 보았든, 이 말은 운명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발병될 유전이든, 변하기 쉽지 않은 자기 성격이든, 운명적인 사회화든, 이미 프로그램되어 운명처럼 결정되어 있는 것이 자기인가, 아니면 자기라는 게 이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데 우연히 이렇게 살다가 프로그램이 된 것인가를 묻는 질문이다. 미국으로 혼자 유학을 간 남자친구는 그녀에게 고통을 함께하고 싶다는 이메일을 보내면서 그 질문에 답이 될 수 있는 시 구절을 인용한다. 서산대사가 임종시 거울을 보면서 읊은 시라고 한다. “80년 전에는 그대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그대로구나.”

철저히 아파해야만 배움을 얻는다

여기서 그대는 거울 속의 자기일 것이다. 살아온 평생, 자기가 만들어온 거울 속의 모습이 자기라고 생각했는데, 죽을 때가 되니 자기는 정해졌던 것이고, 그게 그저 거울에 비칠 뿐이라는 말이 아닐까? 그러나 주인공은 남자친구의 편지에 답하지 않고 비행기를 몰아 하늘로 오른다. 마치 추락이 예상되는, 그리스 신화 속 이카루스의 비상처럼 말이다. 주인공 소정은 거울을 통해 자기를 보려 하지 않고, 자기가 분명히 비친 거울도 보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끝까지 오만한 자의식으로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사진 찍기에 몰두했던 ‘반가사유상의 미소’는 고통을 고통으로 충분히 느끼고 나서, 그로부터 배우고 깨달아 마지막으로 어쩔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면서 짓는 평온한 미소이지, 자의식으로 침묵 속에 비틀리게 웃는 미소는 아니다. 결국 그녀가 찍은 미소들이 하나같이 초점이 맞지 않았음은 지극히 상징적이다. 하지만 추락한 비행기 위에 무력하게 올라 앉아 있는 그녀는 앞으로 다른 미소를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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