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영화사를 빛낼 스펙터클의 <태극기 휘날리며>, 홍경표 촬영감독이 말하는 영화 속 전투 장면들
‘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태극기…>는 새롭다. ‘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이 담겼기 때문이다. 마치 곁에서 터지는 듯 수류탄에 산산조각 흩어지는 파편들, 콩나물시루처럼 몸 하나 꽂을 곳 없는 피난민 열차에 매달린 수만의 사람들, B-29가 하늘을 뒤덮으며 폭탄을 내리꽂는 장면들엔 다큐멘터리적인 사실성이 넘친다. 4년 전 <쉬리>에 과감하게 할리우드식 액션을 도입했던 강제규 감독은 이제 <태극기…>로 한국영화사에 ‘새로운 스펙터클’이라는 장을 다시 쓰게 됐다. 그리고 그 역사를 쓰는 일은 ‘기술적 동반자’의 협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난 <태극기 휘날리며>를 준비하며 내 인생을 걸었다. 하지만 난 내 인생을 바칠 작품에는 특별한 동반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특별한 파트너들은 최고여야 했고, 또한 나와 함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했다. 오랜 과정 끝에 그들을 만나고서야 결국 내 바람이 현실로 되고 있는 것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2003년 2월 홍경표(42) 촬영감독은 강제규 감독과 ‘운명의 동반자’로서 첫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1년 뒤. 가냘픈 꽃미남 원빈이 어떻게 저토록 험난한 전투 장면을 찍었을까, 하는 궁금함은 여전히 홍 감독에게도 적용된다. 10개월 동안 18개 로케 현장에서 펼쳐진 혹독한 촬영, 두달에 걸쳐 숨가쁜 편집·후반작업을 하느라(본래 <태극기…>는 1월16일이 개봉 예정일이었다) 힘에 부쳤을 텐데도 그는 “조금도 살이 빠지지 않았다”며 특유의 강단을 자랑했다.
순제작비 147억원이 투입된 <태극기…>는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물량을 기록한다. 군복 1만9천벌, 군화 1천여 켤레, 1천정이 넘는 총기와 대포·기관총·수류탄·대검이 제작됐고, 200여구의 주검이 만들어졌다. 6t의 화약과 탄약, 폭발물이 투입됐으며, 동원된 엑스트라는 총 2만4천명이 넘어 이들에게 지급된 일당만도 7억7천만원 이상이다. 200여명의 스태프와 수천명의 엑스트라가 한번에 움직이므로 이들의 밥값만 해도 “지역경제 활성화에 일조”할 정도였다.
6t 폭약에 연인원 2만4천명의 엑스트라 “우리는 물론 할리우드식 제작 시스템을 따라갈 순 없다. 그래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영화로 눈이 한껏 높아진 관객들을 배반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태극기…>는 우리 여건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다.” 압록강 퇴각 장면을 찍었던 대관령은 해발 1천m 이상의 고지대로 수시로 짙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게다가 촬영장비를 끌어올 수 있는 도로가 나 있지 않아 촬영에 앞서 두달 동안 도로를 닦는 공병 활동을 벌여야 했다. 진태(장동건)와 진석(원빈)이 징집 열차에 올라탔던 대구 역사 장면을 찍은 곡성역은 넓은 터에 각종 폐건물이 들어찬 최상의 적지였으나, 10년 동안 역이 쓰이지 않아 선로가 엉망이었다.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다는 실제 증기기관차를 분해해 옮긴 뒤 재조립할 수도 없는 일. 제작진은 할 수 없이 3량짜리 증기기관차를 손수 ‘제작’해야 했다. 게다가 전장의 거친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수시로 태워댄 폐타이어 연기는 스태프들을 질식시킬 정도였다. 더구나 촬영팀은 험난한 촬영현장으로 손수 자재들을 날라야 했는데, 밤 촬영 장면에선 달빛이 은은히 비치는 느낌을 살리기 위해 50kW짜리 대용량 조명으로 전체 스케일을 잡아야 했다.
“예측불허의 상황이 연달아 터지는 가운데 몇달이 계속되는 야외촬영을 계속하려면 최대한 지치지 않게 일해야 했다. 우리는 항상 12시간 일하고 12시간 쉬는 원칙을 지켰다. 촬영팀·녹음팀·미술팀 등도 두 팀으로 나뉘어 가능한 한 시간의 누수가 없도록 했다.”
특별한 화면을 만드는 데는 창의력 있는 기술이 필요했다.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은 폭발을 표현하려면 카메라도 함께 떨리면서 촬영을 해야 했는데, 우리나라엔 그걸 표현하는 이미지 셰이크 기계가 없었다. 미국에서 렌트를 해도 최대 3주일밖에 되지 않았고. 할 수 없이 <지구를 지켜라>에서 함께 작업했던 특수촬영기 기사 송선대(34)씨가 휴대폰의 진동 원리를 이용해 흔들리는 효과를 내는 기계를 ‘발명’했다.”
또한 전투 장면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촬영기술도 동원됐다. 가령 카메라 속에 내장된 미러의 각도를 조절해 전투 장면의 리얼리즘을 극대화하는 개각도 촬영을 이용해 화면을 분절적으로 표현하는 방식 같은 것이다(이는 첫 전투의 쇼크로 숨이 넘어갈 듯하는 진석을 붙잡고 정신 차리라며 외치는 진태의 급박함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쓰였다).
<태극기…>는 사실감을 높이기 위한 외형적 규모도 규모이지만, 기술적 성취에서도 의미를 지닌다. 아무리 물량과 인력을 최대한 동원한다 하더라도, 10만명의 중공군 부대가 쏟아져 내려오고 수만명이 피난 열차에 오르고, 비행기 수십대가 하늘을 나는 장면을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는 일. 영화가 보여주는 꽉 찬 화면은 컴퓨터 그래픽의 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모션캡처 카메라로 사람의 동작을 컴퓨터에 입력한 뒤 이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실제 인물처럼 활용하는 디지털 캐릭터를 도입하거나 화면의 전체 색조나 질감을 통일감 있게 보정하는 것은 디지털 기술의 힘이었다.
컴퓨터 그래픽의 위력… 진짜 비행기 아쉬워
그럼에도 그가 못내 아쉬워하는 것은 비행기 폭파 장면에서 비용 문제로 진짜 비행기를 만들지 못했던 점이다. “할리우드에서 보면 비행기나 차량 폭파가 얼마나 리얼한가. 우리도 직접 제작해 폭파시켰더라면 훨씬 리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기술은 모두 ‘전쟁’을 위한 도구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영화를 찍는 내내 이 영화가 액션영화가 아니길 바랐다. 우리가 찍는 것은 처참한 전쟁이라고 되뇌었다. 전쟁을 겪지 않은 나로선, 이 영화가 그 자체로 전쟁의 또 다른 기록이라고 생각했다. ‘관객 1천만명이 볼 영화인데’ 전쟁 같지 않게 표현됐다면 큰 잘못 아닌가.”
그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엉엉 흐느껴 운 적이 많았다고 털어놓는다. “촬영 전에 한국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필름과 문헌자료들을 많이 보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비참한 상황에 몸을 떨었다. 카메라를 들고서도 슬픈 장면에선 배우보다 먼저 눈물이 흘렀다. 벙어리 엄마가 아들과 헤어질 때의 기차역 장면 같은 곳은 안 울고는 못 배기겠더라.”
혹 멜로 코드에 능통한 강제규 감독이 너무나 교묘하게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치들을 숨겨놓은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에 대해 그는 고개를 젓는다. “이야기가 슬픈 게 아니라 400만명이 죽은 한국전쟁이 그렇게 비참한 것이다. 진태·진석 형제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특히 한국전쟁은 고지전과 백병전이 많았다. 몸과 몸이 뒤엉켜 총검으로 찌르는 백병전의 끔찍함이 어느 전쟁보다도 더 잦았다.”
현장에서 전체판을 읽어야 하는 촬영감독으로서 그는 특히 엑스트라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장동건은 <해안선> 같은 영화에서 이미 선 굵은 연기를 잘 보여줬고, 원빈은 두 번째 영화인데 참 너무 많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체력적으로 힘든 영화였는데. 이들도 연기를 잘했지만 엑스트라가 디테일을 잘 살려줬다. 이번엔 20명의 엑스트라가 ‘전문 용병’을 맡아서 엑스트라 소대 하나씩을 지휘했다. 국군도 했다가 인민군도 했다가 하면서. 이들의 도움이 컸다.”
400만명의 죽음, 실제는 더 지독했다
<하우등>으로 28살 때 데뷔한 그는 이번이 11번째 영화다.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선 현상 때 은을 입혀 도시의 세련되면서도 탁한 이미지를 살렸고, <유령>에선 심해 속 잠수함의 음울한 분위기를 표현했다. <반칙왕>은 극단적인 앵글과 조명을 선보여 ‘빛과 색의 마술사’로 이름을 얻었다. “<태극기…>로 1억9500만원을 받아 충무로에서 촬영감독 몸값을 올렸다는 원성을 듣고 있다”는 그는 앞으로 장동건이 출연하고 곽경택 감독이 연출하는 <태풍>을 촬영할 계획이다.
할리우드 영화가 부럽지 않은 스펙터클로 한국 영화사를 빛낼 <태극기 휘날리며>. 스크린에 옮긴 한국전쟁은 ‘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이었다. 홍경표 촬영감독이 <태극기…> 스펙터클의 비밀을 털어놨다. |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태극기 휘날리며>는 새로운 사실을 들춰내지 않는다. 하루아침에 가족과 생이별하고 군에 강제징집되는 청년들, 눈 깜짝할 새 동료의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전장의 참혹함, 우익이라는 이유로, 또는 좌익이라는 이유로 인민군과 국군에게 학살당하는 주민들. 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국전쟁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전투도 낯익다. 파죽지세로 뻗쳐내려온 인민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인 낙동강 방어선 전투, 격전이 벌어진 평양 시가지 전투, 중공군 참전으로 국군이 퇴각하며 벌인 압록강 전투 등 당시 굵직굵직한 전환점을 이룬 주요 전투들이다.
강제규 감독과 함께 전쟁영화의 새 장을 연 홍경표 촬영감독. <태극기…>로써 홍 감독은 강제규 감독과 ‘운명적 동반자’가 됐다.(박승화 기자)
그럼에도 <태극기…>는 새롭다. ‘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이 담겼기 때문이다. 마치 곁에서 터지는 듯 수류탄에 산산조각 흩어지는 파편들, 콩나물시루처럼 몸 하나 꽂을 곳 없는 피난민 열차에 매달린 수만의 사람들, B-29가 하늘을 뒤덮으며 폭탄을 내리꽂는 장면들엔 다큐멘터리적인 사실성이 넘친다. 4년 전 <쉬리>에 과감하게 할리우드식 액션을 도입했던 강제규 감독은 이제 <태극기…>로 한국영화사에 ‘새로운 스펙터클’이라는 장을 다시 쓰게 됐다. 그리고 그 역사를 쓰는 일은 ‘기술적 동반자’의 협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난 <태극기 휘날리며>를 준비하며 내 인생을 걸었다. 하지만 난 내 인생을 바칠 작품에는 특별한 동반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특별한 파트너들은 최고여야 했고, 또한 나와 함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했다. 오랜 과정 끝에 그들을 만나고서야 결국 내 바람이 현실로 되고 있는 것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2003년 2월 홍경표(42) 촬영감독은 강제규 감독과 ‘운명의 동반자’로서 첫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1년 뒤. 가냘픈 꽃미남 원빈이 어떻게 저토록 험난한 전투 장면을 찍었을까, 하는 궁금함은 여전히 홍 감독에게도 적용된다. 10개월 동안 18개 로케 현장에서 펼쳐진 혹독한 촬영, 두달에 걸쳐 숨가쁜 편집·후반작업을 하느라(본래 <태극기…>는 1월16일이 개봉 예정일이었다) 힘에 부쳤을 텐데도 그는 “조금도 살이 빠지지 않았다”며 특유의 강단을 자랑했다.

6t 폭약에 연인원 2만4천명의 엑스트라 “우리는 물론 할리우드식 제작 시스템을 따라갈 순 없다. 그래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영화로 눈이 한껏 높아진 관객들을 배반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태극기…>는 우리 여건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다.” 압록강 퇴각 장면을 찍었던 대관령은 해발 1천m 이상의 고지대로 수시로 짙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게다가 촬영장비를 끌어올 수 있는 도로가 나 있지 않아 촬영에 앞서 두달 동안 도로를 닦는 공병 활동을 벌여야 했다. 진태(장동건)와 진석(원빈)이 징집 열차에 올라탔던 대구 역사 장면을 찍은 곡성역은 넓은 터에 각종 폐건물이 들어찬 최상의 적지였으나, 10년 동안 역이 쓰이지 않아 선로가 엉망이었다.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다는 실제 증기기관차를 분해해 옮긴 뒤 재조립할 수도 없는 일. 제작진은 할 수 없이 3량짜리 증기기관차를 손수 ‘제작’해야 했다. 게다가 전장의 거친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수시로 태워댄 폐타이어 연기는 스태프들을 질식시킬 정도였다. 더구나 촬영팀은 험난한 촬영현장으로 손수 자재들을 날라야 했는데, 밤 촬영 장면에선 달빛이 은은히 비치는 느낌을 살리기 위해 50kW짜리 대용량 조명으로 전체 스케일을 잡아야 했다.

한국 영화사상 최대의 물량이 <태극기…> 제작 현장에 투입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