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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벌어진 앞니 ‘매력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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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2-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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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송 가수 제인 버킨을 에르메스 버킨백으로만 기억해선 안 될 이유

김경/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제인 버킨의 내한공연 소식을 듣고 내가 걱정스러웠던 건 과연 그 명성만큼 좌석을 메울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여자들이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대체로 에르메스 버킨백의 주인공이라는 사실뿐인 듯했기 때문이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버킨백의 명성은 세계의 수많은 직장 여성들이 그 백을 사는 걸 ‘필생의 업’으로 삼을 만큼 높은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 그 가격이 그야말로 ‘헉’ 하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올 만큼 비싸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언젠가 에르메스 매장에 구경갔다가 ‘150만원’이라는 가격표를 보고는 무척 기가 죽었더랬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1500만원’이라고 수정해주는 바람에 나를 두번 죽였던, 바로 그 문제의 핸드백이기도 하다.

뛰어난 장인들이 꼬박 32시간을 들여 겨우 한개를 만드는 진정한 의미의 명품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내겐 너무 비싸다. 더욱 놀라운 건 이 엄청난 고가의 핸드백을 사기 위해 매장에 돈을 지불하고도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5년씩까지 기다리는, 돈 많고 참으로 인내심까지 강한 여자들이 이 세상에는 아주 많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 백의 탄생 설화는 박혁거세나 태조 왕건의 이야기보다 세상에 더 널리 알려져 있다. 1984년 에르메스 5대 손이자 현재 회장인 장 루이 뒤마 에르메스는 어느 날 비행기에서 우연히 샹송 가수이자 영화배우였던 제인 버킨의 옆자리에 앉게 됐는데, 그녀의 어지러운 가방 속을 들여다보고는 “당신의 소지품을 모두 담을 수 있는 가방을 만들자. 그리고 수첩을 넣을 수 있는 주머니를 안쪽에 붙이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첫눈에 버킨백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뒤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제인 버킨은 ‘아무나 소유할 수 없는 특별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그게 ‘아무나 소유할 수 없는 특별한 백’으로 둔갑하여 돈 많은 ‘아무나’에게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긴 하지만.

일단 벌어진 앞니만 봐도 그렇다. 홍상수 감독은 언젠가 어떤 여배우가 크랭크인 하는 날 성형수술을 하고 나타나는 바람에 촬영을 포기하고 싶었다는 고백을 한 적이 있는데, 제인 버킨은 자신의 벌어진 앞니와 입술만 찍은 사진을 앨범 커버로 내세울 정도로 자아가 강한 여자였다. 그런 여자라면 대체로 예술가 타입일 텐데, 버킨은 <007 옥토버스>에서 본드걸로도 출연하여 자신이 세상의 논리로 쉽게 재단할 수 없는 여자임을 알렸다. 패션계에서는 가수나 배우 이전에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는 패션 아이콘으로 더욱 유명한데, 그녀의 스타일은 자기만의 것을 돋보이게 하면서도 누구보다 옷을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입었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버킨의 진짜 매력을 보려면 영화 <아무도 모르게>를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영화를 보면 ‘세상에 이토록 연약하고, 이토록 관능적이고, 이토록 천진하고, 이토록 재치 있고, 이토록 열정적인 여자가 또 있을까’ 싶다. 중년의 이혼녀가 딸아이의 남자친구인 14살짜리 꼬맹이랑 사랑에 빠져 무인도로 도피 여행을 떠나는 내용인데, 뭐라 설명할 수 없이 아름답고 독특한 영화였다.

더욱 놀라운 건 이 황당무계한 영화의 각본을 제인 버킨이 직접 썼고, 두 번째 남편 세르주 갱스부르 사이에서 태어난 친딸 샤를로트 갱스부르가 엄마랑 경쟁하는 ‘연적’으로 출연하고, 설상가상으로 이 영화를 연출한 여감독의 친아들이 제인과 사랑에 빠지는 14살 쿵후 소년을 연기한다는 사실이다. 정말 대단한 여자들의 대단한 영화다. 순수한 열정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꼭 한번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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