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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중국 록음악, 야오군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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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2-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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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주의 물결에 묻혀버린 록전사의 후예들… 한류 스타가 머물던 자리 수입대체 그룹이 넘봐

베이징= 글 · 사진 신현준/ 대중음악평론가

베이징의 교차로에는 좌회전 신호가 별로 없다. 녹색 신호등은 직진이든, 좌회전이든, 우회전이든 모두 가능하다는 신호로 인식된다. 차가 덜 막히던 시절에는 이런 신호체계가 별 무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 난장판이다. 좌회전을 하려는 차가 반대 차선에서 직진으로 달려오는 차를 막아서면 경적을 울려대고 난리가 난다. ‘우회전은 무난하지만, 좌회전은 혼란을 야기하는’ 상황이 지금 중국이 가고 있는 방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류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잡지 <칭춘즈싱>(靑春之星)의 2004년 1월호 표지. 비 ·최지우 ·권상우 ·김하늘 ·배용준 등이 실렸다.

글로벌 자본주의에 의한 팝 혁명


20세기를 회고해볼 때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가장 먼저 연상되는 단어는 ‘혁명’일 것이다. 중국의 현대사 자체가 혁명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들의 공식 사관에 따르면 1840년부터 1919년까지는 ‘구민주주의 혁명’, 1919년부터 1949년까지는 ‘신민주주의 혁명’의 시기다. 또 1966년부터 약 10년 동안은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 진행됐다.

하지만 최근의 중국은 이런 혁명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대신 새로운 혁명이 휩쓸고 있다. 중국의 언어로는 ‘사회주의적 시장경제’, 서방의 언어로는 ‘전 지구적 소비자본주의’를 향한, 글로벌 자본주의가 가져온 ‘소비주의 혁명’이자 ‘팝 혁명’이다. 한 예로 신문이나 잡지를 파는 가판대에는 <인민일보> 대신 대중문화 스타들의 컬러 사진이 표지에 실린 잡지들이 가득하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낯익은 모습들도 많다. 한류(韓流) 스타들이다. 권상우와 비가 표지에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의 연예정보는 시차 없이 실시간으로 이곳에 등장하고 있다.

한류는 지금도 중국에서 높은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몇년 전 문화방송에서 방영했던 연속극 <보고 또 보고>가 지금 히트하고 있다니 흐름이 식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렇지만 한국 드라마가 중국에 진출하기 전 ‘필터링’을 하는 대만에서 시청률이 떨어지고 있다니 미래의 추이는 더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영화의 경우 극장 개봉보다는 DVD와 VCD를 통해 보급되고 있고, 그들 대부분은 ‘다오판’(盜盤·불법복제음반)이니 얼마나 어떻게 보급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음악은? 연말이라 그런지 한국 스타들의 ‘연창회’(演唱會·공연)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 대신 왕푸징(王府井)에 있는 큰 호텔에서 홍보를 위한 쇼케이스를 한다는 소식이 들려서 찾아갔다. 그런데 쇼케이스의 주인공은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인으로 이루어진 신우치(新武器)라는 4인조 남성 댄스그룹이었다. 그렇지만 서울의 한 기획사가 베이징의 한 ‘유한회사’와 합작해 만든 ‘작품’이고, 작곡·안무·뮤직비디오 촬영 등 음반의 제작과 관련된 업무는 한국인들이 담당했으니 한류와 무관치 않다.

한·중 공동작품으로 신우치 등장

중국인 멤버들은 작사·노래·춤 등 주로 ‘노동집약적’인 역할을 맡았고, 지난 가을 한국에서 합숙까지 하면서 연습했다고 한다. 일종의 ‘트랜스 내셔널’ ‘트랜스 아시아’적인 제작 과정인 셈이다.

이런 제작 과정을 통해 어떤 음악이 만들어졌는지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간략히 말해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한국 댄스그룹의 음악과 비슷한 스타일’이다. ‘힙합’이라는 홍보에도 불구하고 정말 힙합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 쇼케이스에서 연주한 두 곡은 마치 H.O.T의 <전사의 후예>와 <캔디>를 듣는 듯했다. “어느 곡이 더 좋으냐”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거기 모인 팬들이 좀더 말랑말랑한 후자를 선택하는 것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베이징의 호텔에서 열린 ‘한-중 합작 댄스그룹’ 신우치(新武器)의 쇼케이스.
중국인들에게 신우치는 한류의 ‘수입대체’ 모델일 것이다. 그런데 왜 한국의 기획사는 한국 댄스그룹을 직접 중국 시장에 진출시키지 않고 이런 대안을 택했을까. 관계자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는데 그건 ‘돈 문제’였다. ‘한국 스타들은 몸값(개런티)이 너무 비싸 공연이나 방송을 자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법음반이 ‘맹활약’하는 중국 시장의 특성상 음반을 판매해 돈을 벌기가 힘들다면 방송이나 공연을 부지런히 해서 스타 마케팅을 해야 하는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한류는 중국에서 ‘인기’를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산업’으로 자리잡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였다. 게다가 한국의 음악산업을 쇠락시킨 ‘고비용 구조’라는 고질적 문제가 한류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류의 앞길에 대해서는 나 같은 사람이 걱정하거나 개입할 처지는 아니다. 오히려 “한류가 과연 ‘음악을 좋아하는 중국인’에게 어떤 반응을 받고 있을까’라는 점이 더 궁금했다. 싼리둔(三里屯)과 허우하이(後海) 등에 밀집해 있는 라이브 클럽에서 만난 무명 그룹의 악사들, 심지어 지하도에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 부르던 10대 음악인 지망생들은 한결같이 “한류는 10대 여자애들이나 좋아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렇다고 한류에 대해 저주하거나 분개하는 것은 아니며, “음악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류 현상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문화적 공간에서 경제적 업소로

그러면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어떤 것일까. 이 점에 대해 말하기 이전에 베이징에서 일상적으로 음악이 연주되는 공간들에 대한 설명부터 해야 할 것이다. 방금 언급한 싼리둔이나 허우하이 같은 곳이 그런 공간이다. 이런 곳에 있는 클럽들은 한때 풋풋한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이 종종 연주하는 곳이었고, 서울 홍익대 앞이나 도쿄 하라주쿠처럼 외국인들도 자주 다니는 ‘쿨’(cool)한 장소라는 것이 전해들은 정보였다.

화려하게 황폐화된 산리툰 클럽의 ‘밤무대’의 장면들.
그렇지만 지금 이곳들은 화려하게 황폐화되었다. 클럽들은 문화적 공간이라기보다는 경제적 업소에 가까웠고, 거리의 풍경은 마치 ‘하라주쿠에 미사리 카페가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어디를 가나 기타 연주자 한명과 여자 가수 한명, 키보드 연주자 한명으로 이루어진 밴드가 표준 편성이었고, 이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홍콩과 대만(심지어 한국)에서 만들어진 팝이 대부분이었다. 한 업소에서는 이정현의 <와>를 중국어로 개사한 노래가 흘러나와서 나를 실소하게 만들었다.

장위엔 감독의 1993년 영화 <북경녀석들>(北京雜種)에 등장하는 클럽과 공연장같이, 중국의 록음악, 이른바 야오군(搖滾)의 영광스러웠던 흔적을 찾고 싶던 나에게 이곳의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몰고 온 소비주의의 물결은 중국 혁명의 이상은 물론 중국 록의 꿈도 익사시켜버린 것만 같았다.

걸러진 야오군, 내면 세계로 침잠

앞서 나에게 ‘한류에 관심 없다’는 식으로 말한 사람들은 이곳에서 기타를 연주하던 사람들이었다. 30줄에 접어든 이 악사들은 밥 말리나 메탈리카의 티셔츠를 입었지만, 여가수들의 노래에 반주를 해주면서 간간이 팝송을 부르는 일을 천직처럼 삼고 있었다. ‘중국판 와이키키 브라더스’라고 하면 좋으려나…. 아무튼 이런 모습은 중국인들이 허우신스치(後新時期)라고 부르는 ‘포스트모던’ 상황의 단면이었다.

재즈 클럽 콰이러잔(快樂站)에서 연주하는 뮤지션들. 드럼은 베이베이, 베이스는 장링 등 모두 추이젠 밴드의 일원이다. 가수는 한홍.
그렇다면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이런 모습이 되어 있는 것일까. ‘중국 록의 할아버지’ 추이지엔의 밴드에서 드럼을 연주하는 베이베이라는 젊은 음악인을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다. 자오양공원(朝陽公園)의 남문 부근에 위치한 콰이러잔(快樂站)이라는 재즈 바였다. 이곳에서 중국인 음악인들은 일본인, 미국인과 어우러져 함께 연주하고 있었다. 우리가 갔던 날은 운 좋게도 티베트(西臟·시짱) 출신의 여가수 한홍(韓紅)까지 가세하여 그녀의 탁월한 노래 솜씨도 감상할 수 있었다.

이 클럽은 외부의 일상과는 또 다른 세계를 만들고 있었다. 물론 이곳의 또 다른 세계란 것도 글로벌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의 영향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단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단언하기에는 상황이 복잡해 보였다. 무엇보다 중국의 음악인들에게는 초조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베이베이는 “그동안 야오군(록)이 유행처럼 휩쓸고 간 뒤 이제는 남을 사람들만 남았다. 차라리 잘 됐다”라는 식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초조해하는 한국의 풍토와는 조금 달랐다. 국민성의 차이일까.

어쨌든 중국 록의 살아남은 자들은 내면 세계로 깊게 침잠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그날 재즈 클럽에서 들었던 즉흥 잼 연주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국 록의 또 한명의 거물인 두웨이(竇唯)가 2003년에 발표한 음반 <조용한 작은 마을>(靜寂的小鎭)은 재즈, 일렉트로니카, 포스트록 등 첨단 조류를 원용한 전위적이고 난해한 음악이었다. 추이지엔이 곧 발표한다는 앨범 <농촌이 도시를 포위하다>(農村包圍城市)에 수록될 음악도 전자 음향이 많이 들어가고 한국의 전통 리듬까지 원용한다고 귀띔해주었다. 이런 이야기는 추이지엔의 음반이 정식 발표된 다음에 다시 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진정한 대중문화의 혁명을 위하여

이런 여러 풍경을 보면서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후신시기’의 동아시아에서 주류와 메이저에 속하는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면서’ 국경을 넘나들며 다양한 시도를 하는 반면, 비주류와 마이너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로컬’한 영토에만 갇혀 있는 건 아닌가 라는 의문이었다. 아직까지 이들 사이에는 적극적인 ‘교류’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한류의 두 번째 흐름은 ‘가장 인기 있는 장르만의 열풍’과는 다른 것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소 아쉬운 점이었다.

어쨌거나 한국에서든 중국에서든 대중문화가 팽창하면서 공적 영역으로서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는 현실에서 이의 진지한 반응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한류에 대한 한국 안의 반응도 마찬가지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실용적(민족주의적?) 태도와 ‘그게 뭐냐? 창피해 죽겠다’는 냉소적 태도를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할 시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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