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중숙 | 순천대학교 교수 · 이론화학 jsg@sunchon.ac.kr
오일러(L. Euler, 1707~83)는 양적 측면에서 보자면 수학 역사상 가장 많은 업적을 쌓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평생 500편이 넘는 저서와 논문을 출판했는데 모두 합치면 연평균 800쪽이 넘는 엄청난 분량에 달한다. 또한 표기법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해서 그 편리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우리가 현재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몇 가지의 기호, 즉 함수, 수열의 합, 자연로그의 밑, 허수 단위를 나타내는 f(x), Σ, e, i 등의 기호는 그가 창안했다. 원주율 π는 이전부터 쓰여왔지만 오일러가 본격적으로 사용함에 따라 확고한 표기로 자리잡았다. 특히 “eiπ+1=0”이란 식에는 그의 공헌이 깃든 3개의 수가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흔히 이 식을 수학의 전 분야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식’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오일러는 수학적 재능의 토대 위에 노력의 품성까지 더해진 이상적인 천재였다. 그런데 너무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일찍이 20대에 오른쪽, 그리고 60대에 이르러서는 왼쪽 눈마저도 실명했다. 하지만 이런 시련에 대하여 오일러 자신은 그다지 크게 괘념하지 않았다. 한쪽 눈을 잃었을 때 그는 “한 눈으로 보니 모든 현상이 더욱 또렷이 보인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두 눈을 모두 잃었을 때 주위 사람들은 “오일러는 실명한 이후 사고력과 상상력이 도리어 더 깊어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받기도 하는 몇 가지 연구는 두 눈을 모두 잃은 뒤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베토벤(L. Beethoven, 1770~1827)은 악성으로 추앙받는 위대한 음악가다. 어떤 분야든 신동이나 천재로 불리는 사람은 많지만 성인의 경지에 달했다고 평가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점이 그의 위대성을 웅변한다. 그런데 30살 무렵부터 음악가에게 생명과도 같은 청각이 감퇴되어 45살에 이르러서는 청각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이 때문에 너무나 절망한 나머지 그는 동생에게 유서를 쓴 뒤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을 되돌려 아무 소리도 없는 침묵 속에 살면서 음악의 길에 계속 정진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최고 대작으로 꼽는 제9번 합창교향곡도 50살이 넘어서야 완성되었다. 오일러는 두 눈을 잃은 암흑의 세계에서, 그리고 베토벤은 청각을 잃은 정적의 세계에서 오히려 더욱 깊은 자연의 섭리와 선율을 보고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쯤에서 우리의 머리 속에는 “차라리 처지를 바꾸어 오일러가 청각을 잃고 베토벤이 시력을 잃었더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물론 그렇더라도 잃지 않으니만은 못하겠지만 그들이 개인적으로 당한 고통은 크게 절감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오일러의 수학 연구에는 눈, 베토벤의 음악 활동에는 귀가 더 유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은 짓궂게도 그들로부터 각각 더욱 절실한 것들을 앗아갔다. 비록 두 사람의 태도는 대조적이었지만 어쨌든 이로써 잔혹한 운명의 의도는 완성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운명의 뒤안길에는 쉽사리 헤아릴 길 없는 깊은 의미가 감도는 듯하다. 신비로운 인간의 능력은 물리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실제로 겪은 고난은 후세의 사람들에게 소중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은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