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 변화의 실체를 보여주는 사진과 자료… 선 · 면 통해 근대인으로 거듭나는 조선 사람들
천정환/ 문화기획 <퍼슨웹> 기획위원,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생각의나무 펴냄)을 읽다 지리·경제학자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가 말한 ‘시공간 압축’이라는 명제가 먼저 떠올랐다. 자본주의적 근대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사고하고 판단해야 하는 시간을 줄인다. 그리고 그 사고와 판단은 다른 공간에 있는 인간들에게 훨씬 빨리 그리고 넓게 전파된다. 이 책에도 나온 이런 예를 들면 딱 좋겠다.
1896년 2월, 20살이던 젊은 김구는 일본군 정보장교를 ‘때려’ 죽이고 잡혀 사형수가 된다. 속절없이 죽을 뻔한 그를 구한 것은 서울에서 인천 감옥으로 걸려온 한통의 전화. 사형집행 몇 시간 전에 사실을 알게 된 고종이 인천에 직접 전화를 걸어 사면을 지시했다.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가 가설된 지 불과 3일 만의 일이었다. 만약 전화 가설이 일주일 미뤄졌거나, 편지를 쓰거나 파발을 달리게 하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전화가 서울과 인천 사이의 시간·공간을 통조림만하게 줄여, 임금님 침소 앞에 떡 갖다놓아 김구를 살린 것이다.
어떤 추상보다도 강력한 그림의 힘
근대성 자체이며 그 상징이기도 한 철도와 전기통신, 도로들 때문에 세상은 거기가 어디든, 얼마나 멀든, 리얼타임(real time) 속에 있게 된다. 이제 정말 축지법과 구름타기가 가능해졌다. 그리고 도시라는 근대화의 거점들이 생겨나 18세기적인 것과 20세기적인 것을 공존하게 만든다. 흰 옷 입은 농군이 소달구지를 끌고 시속 3km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그 옆을 스쳐 시속 30km의 전차가 달려가고, 전찻길 옆 전신주는 초속 30만km로 소리와 그림을 실어나르고 있다. 이런 차이가 근대의 유혹과 아픔을 빚는다. <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은 이러한 시간·공간의 근본적 변화라는 사회과학적 ‘추상’을 ‘구체’로 보여준다. 그 구체는 지도와 391장에 이르는 사진들이다. 이 도상 기호들이 ‘고요한 아침’이던 조선의 땅과 삶이 불과 십수년 만에 완전히 다른 땅이 되어간 과정을 웅변한다. 그 힘은 문학적 직관이나 사회과학적 실증보다 결코 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일제 시기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를 바꿔놓을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고 이종학 선생이 저자에게 제공한 이미지 자료는 전공자인 필자도 처음 보는 것들로서 사진과 특별부록으로 제공된 ‘경성 시가 지도’만 봐도 사실 배가 부르다. 적어도 이 점에 관한 한, 책은 근래 발간된 ‘근대’를 다룬 다른 책을 압도할 만하다. 오, 왜 이제야! 이런 자료들이 공개되었는지? 부러움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꼈다. 특히 관운동 이문당 서점, 충무로의 환락가, 부산 동래온천장과 여객부두, 삼방 탄산천 약수터와 스키장 사진에서 한참 눈을 떼기 어려웠다. 책의 1부는 철도와 전신뿐 아니라 신작로와 도시 가로 같은 새로운 선(線)들을 다룬다. 새로운 선이야말로 시공간을 압축하고 점(點)들을 창조한다. 점들은 다름 아닌 상가와 백화점, 증권시장 같은 완전히 새로운 공간이다. 그리고 선을 오가며 점과 점을 연결하는 물건이 있으니 전차와 자동차이다. 그 위에서 조선인들은 근대인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2부는 면(面)이다. 책은 함경도, 평안·황해도, 경성, 경기·강원도, 충청·전라도, 경상도 등 ‘지역’의 근대를 차례로 훑었다. 근대성을 논하는 책에서 사실 서울은 오랫동안 여러모로 부각되었다. 서울이야말로 거점 중의 거점이며 근대의 모든 모순이 응집되는 공간이기 때문에. 하지만 전통적으로 큰 도시였던 평양이나 대구의 변화나 근대화의 관문 역할을 한 신흥 항도 부산·인천·원산·목포가 한 역할도 실로 만만찮았을 것임에도 별로 거론된 바가 없다. 단지 그들이 지방이라는 이유로. 물론 지역사의 변화를 다룬 향토지(鄕土誌)야 동네별로 있겠지만, 이렇게 한자리에 모아놓고 ‘근대’가 어떻게 실제로 조선 팔도의 거점(據點)을 개척해나갔는지를 살핀 책은 거의 없었다. 이 대목에서 저자와 이종학 선생의 노고와 열정에 다시 머리를 숙여야 했다. 근자에 활발하게 간행된 식민지 근대를 다룬 책들은 그 시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를 우리 앞에 제기한다. “정치, 사회제도의 폭압성과 소비문화의 매혹이 뒤얽힌 근대 생활의 파노라마가 바로 당대의 시공간 속에서 표출되었다는 것은 식민지 근대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기본 전제다”는 책의 기본 관점에 100%의 지지를 보낸다. 그런데 정치나 사상 같은 틀이나 ‘독립운동사’로만 식민지 시대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지양하자는 이런 명제가 매우 당연한 듯하지만, 의외로 이 명제가 절대 잘 안 먹히는 동네가 두 군데 있다. 식민지 근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첫째는 노골적인 친일 경력을 갖고 있는 세력과, 그들과 모종의 연락을 가진 일부 기득권 세력이다. 이들은 대개 과거를 감추고 싶어하지만 때로 그 두꺼운 맨얼굴을 드러내왔다. 친일인명사전을 못 만들게 한다거나 ‘친일은 없다’며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를 말한 최근의 실례들이 이와 무관하지 않을 터. 그들이 좋아하는 학문적 포장이 식민지 근대화론인데, 식민지 시기 동안의 ‘근대화’나 경제성장의 ‘객관적’ 지표와 수치를 들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거나 그 추악함에 물타기하자는 논리이다. 일제에 의한 근대화가 매우 질 나쁜 인종주의와 군사파시즘에 근거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하는 이 논리는 상당히 음험하다. 더구나 이는 매우 쉽게 박정희나 전두환 체제에 대한 옹호론으로도 수렴될 수 있기에 좋지 않다. 두 번째는 ‘쌩’ 민족주의자들이다. 사람에는 친일파와 독립군, 딱 두 종류만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그들은 도덕적 자신감 때문인지 무척 지적으로 게으르다. 그들은 ‘식민지 근대’를 말하는 것과 식민지 근대화론을 인정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알지 못하며, 일본만 없었다면 우리 근·현대사가 ‘왜곡’되지 않고 행복했을 것이라는 매우 아메바스런 견해를 신념으로 갖고 있기도 하다. 사실 첫 번째가 후자를 계속 유지·재생산하는 온상이기는 하다. 최근의 책들은 이러한 시각을 교정하고, 좀더 전체사적인 시각에서 일제 시기를 보고 식민지 체제를 정당하게 비판할 수 있는 시야를 틔우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다른 책들과 달리 책의 서술이 개설적이다. 다루는 범위나 주제가 시간·공간·지역 등 대단히 거시적인 탓이리라. 그래서인지 사진도 원경이 많고, 부제도 ‘근대 한국을 거닐다’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하기에 일제 시기에 대한 자신의 전반적 시각을 점검하고 싶은 분들은 이 책을 먼저 읽는 것도 좋겠다. 그런 다음에 좀더 깊이 그 시절을 째고 들어간 책들을 읽어도 충분하다.

『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 노형석 지음, 이종학 사진·자료 제공, 생각의나무 펴냄
근대성 자체이며 그 상징이기도 한 철도와 전기통신, 도로들 때문에 세상은 거기가 어디든, 얼마나 멀든, 리얼타임(real time) 속에 있게 된다. 이제 정말 축지법과 구름타기가 가능해졌다. 그리고 도시라는 근대화의 거점들이 생겨나 18세기적인 것과 20세기적인 것을 공존하게 만든다. 흰 옷 입은 농군이 소달구지를 끌고 시속 3km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그 옆을 스쳐 시속 30km의 전차가 달려가고, 전찻길 옆 전신주는 초속 30만km로 소리와 그림을 실어나르고 있다. 이런 차이가 근대의 유혹과 아픔을 빚는다. <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은 이러한 시간·공간의 근본적 변화라는 사회과학적 ‘추상’을 ‘구체’로 보여준다. 그 구체는 지도와 391장에 이르는 사진들이다. 이 도상 기호들이 ‘고요한 아침’이던 조선의 땅과 삶이 불과 십수년 만에 완전히 다른 땅이 되어간 과정을 웅변한다. 그 힘은 문학적 직관이나 사회과학적 실증보다 결코 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일제 시기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를 바꿔놓을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고 이종학 선생이 저자에게 제공한 이미지 자료는 전공자인 필자도 처음 보는 것들로서 사진과 특별부록으로 제공된 ‘경성 시가 지도’만 봐도 사실 배가 부르다. 적어도 이 점에 관한 한, 책은 근래 발간된 ‘근대’를 다룬 다른 책을 압도할 만하다. 오, 왜 이제야! 이런 자료들이 공개되었는지? 부러움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꼈다. 특히 관운동 이문당 서점, 충무로의 환락가, 부산 동래온천장과 여객부두, 삼방 탄산천 약수터와 스키장 사진에서 한참 눈을 떼기 어려웠다. 책의 1부는 철도와 전신뿐 아니라 신작로와 도시 가로 같은 새로운 선(線)들을 다룬다. 새로운 선이야말로 시공간을 압축하고 점(點)들을 창조한다. 점들은 다름 아닌 상가와 백화점, 증권시장 같은 완전히 새로운 공간이다. 그리고 선을 오가며 점과 점을 연결하는 물건이 있으니 전차와 자동차이다. 그 위에서 조선인들은 근대인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2부는 면(面)이다. 책은 함경도, 평안·황해도, 경성, 경기·강원도, 충청·전라도, 경상도 등 ‘지역’의 근대를 차례로 훑었다. 근대성을 논하는 책에서 사실 서울은 오랫동안 여러모로 부각되었다. 서울이야말로 거점 중의 거점이며 근대의 모든 모순이 응집되는 공간이기 때문에. 하지만 전통적으로 큰 도시였던 평양이나 대구의 변화나 근대화의 관문 역할을 한 신흥 항도 부산·인천·원산·목포가 한 역할도 실로 만만찮았을 것임에도 별로 거론된 바가 없다. 단지 그들이 지방이라는 이유로. 물론 지역사의 변화를 다룬 향토지(鄕土誌)야 동네별로 있겠지만, 이렇게 한자리에 모아놓고 ‘근대’가 어떻게 실제로 조선 팔도의 거점(據點)을 개척해나갔는지를 살핀 책은 거의 없었다. 이 대목에서 저자와 이종학 선생의 노고와 열정에 다시 머리를 숙여야 했다. 근자에 활발하게 간행된 식민지 근대를 다룬 책들은 그 시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를 우리 앞에 제기한다. “정치, 사회제도의 폭압성과 소비문화의 매혹이 뒤얽힌 근대 생활의 파노라마가 바로 당대의 시공간 속에서 표출되었다는 것은 식민지 근대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기본 전제다”는 책의 기본 관점에 100%의 지지를 보낸다. 그런데 정치나 사상 같은 틀이나 ‘독립운동사’로만 식민지 시대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지양하자는 이런 명제가 매우 당연한 듯하지만, 의외로 이 명제가 절대 잘 안 먹히는 동네가 두 군데 있다. 식민지 근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첫째는 노골적인 친일 경력을 갖고 있는 세력과, 그들과 모종의 연락을 가진 일부 기득권 세력이다. 이들은 대개 과거를 감추고 싶어하지만 때로 그 두꺼운 맨얼굴을 드러내왔다. 친일인명사전을 못 만들게 한다거나 ‘친일은 없다’며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를 말한 최근의 실례들이 이와 무관하지 않을 터. 그들이 좋아하는 학문적 포장이 식민지 근대화론인데, 식민지 시기 동안의 ‘근대화’나 경제성장의 ‘객관적’ 지표와 수치를 들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거나 그 추악함에 물타기하자는 논리이다. 일제에 의한 근대화가 매우 질 나쁜 인종주의와 군사파시즘에 근거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하는 이 논리는 상당히 음험하다. 더구나 이는 매우 쉽게 박정희나 전두환 체제에 대한 옹호론으로도 수렴될 수 있기에 좋지 않다. 두 번째는 ‘쌩’ 민족주의자들이다. 사람에는 친일파와 독립군, 딱 두 종류만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그들은 도덕적 자신감 때문인지 무척 지적으로 게으르다. 그들은 ‘식민지 근대’를 말하는 것과 식민지 근대화론을 인정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알지 못하며, 일본만 없었다면 우리 근·현대사가 ‘왜곡’되지 않고 행복했을 것이라는 매우 아메바스런 견해를 신념으로 갖고 있기도 하다. 사실 첫 번째가 후자를 계속 유지·재생산하는 온상이기는 하다. 최근의 책들은 이러한 시각을 교정하고, 좀더 전체사적인 시각에서 일제 시기를 보고 식민지 체제를 정당하게 비판할 수 있는 시야를 틔우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다른 책들과 달리 책의 서술이 개설적이다. 다루는 범위나 주제가 시간·공간·지역 등 대단히 거시적인 탓이리라. 그래서인지 사진도 원경이 많고, 부제도 ‘근대 한국을 거닐다’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하기에 일제 시기에 대한 자신의 전반적 시각을 점검하고 싶은 분들은 이 책을 먼저 읽는 것도 좋겠다. 그런 다음에 좀더 깊이 그 시절을 째고 들어간 책들을 읽어도 충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