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 3집 음반 <7th Issue>에 흐르는 강박적 여유… 여전히 자신의 음악적 역사 기록에 사로잡혀
최민우/ 대중음악 웹진 편집위원 eidos4@freechal.com
어떤 것은 빨리 사라진다. 서태지 솔로 3집(통산 7집) <7th Issue>의 재고량도 그 중 하나다. 어떤 신문의 보도를 믿을 수 있다면, 1월27일 나온 서태지의 음반은 발매 이틀 만에 첫번 주문량인 30만장이 모두 팔렸다. 전단지 뿌리듯 팔려나간 셈인데, 이런 종류의 기사에 과장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새 음반이 최근에 보기 드문 반응을 얻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음반 발매 직전에 연 기자회견에서 서태지는 자신의 신보가 “대중적인 감성 코어”이고, “상업적 성공의 기대”를 품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은 그의 기대를 채워주고 있다.
더 강박적인, 덜 대중적인
38개월 만에 내놓은 신보라는 말이 선뜻 실감나지 않는 것은 그가 오랫동안 대중적인 관심에서 멀어지지 않았다는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로 주류 대중음악계에 데뷔한 이래 대략 10분의 1세기에 이르는 경력의 와중에서, 서태지는 거의 한번의 실패도 없이 효과적인 미디어 서커스를 감행해왔다. ‘아이들’의 해체 이후 다소 줄어든 ‘뮤지션’으로서의 관심은 ‘사업가’로서의 관심이 대체했다. 2001년에는 ‘서태지닷컴’(www.seotaiji.com)과 자체 레이블 ‘괴수대백과사전’을 설립했다. 2002년에는 음악팬들 사이에서 ‘말 많고 탈 많았던’ ETPFEST(‘기괴한 태지 사람들의 축제’의 약자) 콘서트를 개최했다. 2003년에는 인디 록 씬에서 스카우트한 모던록 밴드 넬(Nell)과 하드코어 밴드 피아(PIA)의 음반을 제작했다. 이 사실들은 미디어를 통해 소상히 전해졌다. 피아의 음반은 잘 짜인 수작이었고 넬의 음반은 나름의 장점과 단점을 갖춘 평이한 음반이었지만, 관심은 앨범의 내용보다는 서태지와 이들과의 관계에 더 집중되었다. 그렇다면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뮤지션으로서의 서태지는? 이렇게 간추려보면 어떨까. 더 강박적인, 덜 대중적인.
1998년에 나온 그의 첫 번째 솔로 음반 〈Seotaiji 5〉는 1990년대의 가장 자폐적인 한국 록 음반 중 하나일 것이다. ‘듣기만 하라’는 명령이 내내 울리는 듯한 둔탁하고 꽉 짜인 소리 뭉치 속에서, 서태지는 시끄러운 기타 소리 너머로 영문 모를 가사를 씹듯이 내뱉었다. 〈Take 2〉의 “마이크에 껌이 붙었다”는 가사는 그와 듣는 이와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서태지와 듣는 이와의 사이에도 껌이 붙어 있었다.
솔로 2집은 비싼 프라모델 같은 음반이었다. 정교하고 화려하지만 건전지가 필요해 보였다. 그가 표절했다는 시비가 일던 미국의 록밴드 콘(Korn)과 다른 것은 이 점이었다. 사운드에 대한 서태지의 강박은 있었지만, 콘과 같은 야성적이고 생동하는 공격성은 없었다. 라이브 음반과 묶어 발매한 리레코딩(Re-Recording) 음반은 헤비 록 사운드에 대한 서태지의 집착이 극단으로 갔음을 말할 뿐이었다. 볼륨은 커지고 사운드는 퍼렇게 날이 섰지만 정작 그가 표현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는 한낮에 켠 가로등처럼 희미했다.
절충적인 시도 ‘서태지 클리셰’
이 음반들은 서태지가 대중적인 반응보다는 자기 자신의 음악적 역사를 기록하는 데 더 관심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더불어 ‘영미권에서는 대중적이지만 한국에서는 인기 없는’ 장르를 선구적으로 도입하던 서태지의 발걸음이 느려졌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이번 7집 음반에 대한 서태지의 자신감은 그 또한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이제 그 문제를 해결했다는 선언일 것이다. 어떻게 해결한 것일까.
간단히 말해, 서태지의 새 음반은 ‘아이들’ 시절과 솔로 시절의 작업을 절충한다. ‘아이들’ 시절의 모습이란 밝고 맑은 멜로디와 다양한 스타일의 과시이다. 만약 ‘헤비메탈’이나 ‘갱스터 랩’과 같은 표제어에 홀리지 않는다면 ‘아이들’ 시절의 서태지가 한 음반 안에 온갖 장르를 전시했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솔로 시절의 모습이란 록 사운드이다. 신보에서 서태지는 자신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준 예전의 방식과 현재 그를 사로잡고 있는 헤비 록 사운드를 섞는다. 이런 방식은 절충적인 것이 대개 그렇듯, 어떤 새로운 방향을 지시하거나 성숙함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감성 코어’라는 신조어는 그냥 ‘서태지 클리셰’라 생각하는 것이 옳다.
어쨌든 연극적인 〈Heffy End〉나 사뭇 진지한 <로보트> <0>(Zero) 등은 시끄럽지만 잘 다듬어진 기타 사운드에 실은 멜로디로 매끄럽게 뇌세포를 공격한다. 그의 예전 히트곡들처럼 기억 속에 오래 남지는 않지만 듣는 동안에는 거부감 없이 흘러간다. 사운드는 이전 음반보다는 한결 트여 있다. 오랜만의 서태지표 발라드인 <10월4일>을 들으며 향수에 젖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테크노 장르의 일종인 드릴 앤 베이스(Drill'n Bass)와 헤비 록 사운드를 깔끔하게 얽어내는 〈Live Wire〉 같은 곡은 소리의 배치에 대한 그의 기민한 감각이 살아 있음을 들려준다.
산만한 구성에도 통제된 흐름
그러나 신보에 그가 강조한 여유와 자연스러움은 없다. 산만한 구성과는 별개로, 곡의 흐름은 철저히 통제되어 있다. 악기들과 효과음이 치고 빠지면서 청자의 정서를 파고드는 지점들은 지나치게 계산적이다. 그래서 이 음반에서 찾게 되는 여유는 숲을 헤매다 우연히 발견한 쉼터에서 얻는 ‘위험하지만 창조적인’ 것보다는 시립공원의 ‘안전하지만 뻔한’ 여유에 더 가깝다. <0>(Zero)의 쓸쓸하고 웅대한 울림에, ”어쩌면 다 모두 다 같은 꿈/ 모두가 가식뿐/ 더 이상 이 길엔 희망은 없는가“라는 가사에 같이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떤 것은 정말 빨리 사라진다. 수많은 가수들의 존재와 그들에 대한 기억도 그 중 하나다. 그러나 서태지는 같은 방식으로 같은 성공을 손에 쥔다. 서태지의 성공적인 또 한번의 컴백은 유행 따라 정신없이 흘러가는 줄 알았던 한국의 대중음악계가 지난 10분의 1세기 동안 자기 영역을 꾸려온 방식이 라이터 디자인보다도 느리게 변했음을 보여준다.
이 역설의 중심에서 육중한 기타 소리에 맞춰 음악산업을 비난하는 곡(〈F.M Business〉)을 당당하게 연주하는 이는 현재로서는 오직 하나뿐이다. 음반업계는 서태지의 신보가 침체에 빠진 시장을 구원해줄 것이라 믿는 분위기다. 그러나 서태지의 음악은 ‘아이들’ 이후 자기 자신(과 팬들)의 역사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 대중성을 강조했다고 해서 그 점이 변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스스로 구하라’는 말을 되새기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서태지의 새 음반 . 발매 첫날 30여만장이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38개월 만에 내놓은 신보라는 말이 선뜻 실감나지 않는 것은 그가 오랫동안 대중적인 관심에서 멀어지지 않았다는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로 주류 대중음악계에 데뷔한 이래 대략 10분의 1세기에 이르는 경력의 와중에서, 서태지는 거의 한번의 실패도 없이 효과적인 미디어 서커스를 감행해왔다. ‘아이들’의 해체 이후 다소 줄어든 ‘뮤지션’으로서의 관심은 ‘사업가’로서의 관심이 대체했다. 2001년에는 ‘서태지닷컴’(www.seotaiji.com)과 자체 레이블 ‘괴수대백과사전’을 설립했다. 2002년에는 음악팬들 사이에서 ‘말 많고 탈 많았던’ ETPFEST(‘기괴한 태지 사람들의 축제’의 약자) 콘서트를 개최했다. 2003년에는 인디 록 씬에서 스카우트한 모던록 밴드 넬(Nell)과 하드코어 밴드 피아(PIA)의 음반을 제작했다. 이 사실들은 미디어를 통해 소상히 전해졌다. 피아의 음반은 잘 짜인 수작이었고 넬의 음반은 나름의 장점과 단점을 갖춘 평이한 음반이었지만, 관심은 앨범의 내용보다는 서태지와 이들과의 관계에 더 집중되었다. 그렇다면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뮤지션으로서의 서태지는? 이렇게 간추려보면 어떨까. 더 강박적인, 덜 대중적인.

서태지컴퍼니 제공

솔로 3집 음반을 발표한 서태지가 컴백공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서태지컴퍼니 제공)

서태지컴퍼니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