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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내 식대로 놀며 쉰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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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2-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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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연휴를 만끽하는 몇 가지 방법… 내겐 홈쇼핑 · 페인트칠이 소중하다구요

김경 |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명절 연휴가 되면 나처럼 괜찮은 여자가 왜 아직까지 결혼을 못했나 하는 불가사의한 문제의 해답이 너무 분명하게 보인다.

그러니까 지난 설 전날, 나를 포함한 세명의 독신 여성들이 뭘 했냐 하면 밤새도록 수다를 떨고, 와인을 마시고, 그리고 ‘WIZWID.COM’에서 쇼핑을 했다. “야, 이것 봐. 이 스트랩 힐 DKNY 건데 겨우 8만9천밖에 안 해?” “어디 봐? 품절이네.” “아, 나는 이 솔드 아웃(sold out)이라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진짜 절망적인 건 구두만 그런 게 아니란 거야. 우리 나이에 쓸 만한 남자는 이제 다 완전히 품절이라고.” “그래도 이게 낫지? 결혼했으면 지금쯤 명절병에 온몸과 마음이 상해서 클릭할 힘도 없었을걸.”

그 다음날 엄마의 간곡한 부탁으로 거의 5년 만에 처음 외할머니 댁을 방문했다. 역시 친척들이 한 집 가득 모여 있는 곳에서 몸둘 바를 몰라하고 있는데, 촌수를 알 수 없는 어떤 남자 어른이 나를 아예 아연실색케 했다. “야, 너 그 치렁치렁한 머리 좀 묶어라. 잘난 얼굴 가리잖아?”


갑자기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생각났다. 집에 가서 머리 묶고 오라며 나를 교실 밖으로 내쫓은 여교사였다. 그때도 나는 운동장에 나가서 고무줄 대신 선생님 ‘암살 도구’를 찾으며 이를 갈았다. 그 어린 나이에도 자기가 선생이면 구구단이나 맞춤법만 가르칠 일이지 왜 남의 스타일이나 개성까지 무시하며 그런 폭력을 행사하냐고 생각했다. 그건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폭력이다.

그런데 서른셋의 성인 여자에게도 아직도 그런 종류의 권위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어른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그런데 내가 만약 그런 어른을 시아버지로 두고 있다면?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날 밤이 돼서야 나는 친척집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케이블TV를 보며 겨우 삭일 수 있었다. 클래식한 원버튼 가죽 재킷 1벌을 사면 캐주얼한 집업 스타일의 가죽 재킷을 한벌 더 준다기에 망설임 없이 ‘080’을 눌렀다. 내 주변의 쇼핑 전문가들에 의하면 가죽옷은 뭐니뭐니해도 홈쇼핑에서 사는 게 제일 남는 장사란다.

소파에 누워 순식간에 19만8천원을 해치운 다음 채널을 돌려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보기 시작했다. 이미 두번이나 본 영화였지만 재미가 남달랐다. 전국의 온 가정에서 따뜻한 사랑의 불을 지피고 있는 숭고한 시간에 불륜 영화를 보는 이 짜릿한 스릴이라니…. 아, 그런데 다시 보니 옥의 티가 보인다. 메릴 스트립의 남편인 촌부에게도, 그의 사진가 애인에게도 똑같이 멋대가리 없는 멜빵 바지를 입히다니, 이 영화의 의상 담당자는 시나리오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

그 다음날 친하게 지내는 남자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누나 뭐해?”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자립한 독신 여성들에게 호기심이 많은 녀석이라 그냥 솔직하게 얘기해줬다. “싱크대에 페인트칠 하고 있어.” “설마 빨간색?” “응, 맞아.” “와, 진짜 괴기스럽다. 지금 누나 모습은 영화 <파니 핑크>의 그 노처녀만큼이나 우스꽝스럽고 우울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거야?”

<섹스 앤드 더 시티>의 그 여자들처럼 미모와 재력, 성공이라는 삼박자를 두루 갖추고 분방한 성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명절 때만 되면 아직 미혼이라는 사실에 나는 안도한다. 괴기스럽든 우울하든 남의 시선은 내 알 바 아니고, 적어도 모처럼만의 휴가를 내가 원하는 공간에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내 시간과 돈을 쓰며 소비할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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