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출판- 가족 신화의 비극을 아는가

494
등록 : 2004-01-29 00:00 수정 : 2008-09-17 19:17

크게 작게

여성학자 조주은씨가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현대차 노동자 가족의 빛과 그림자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에게는 언론의 집중 조명이 쏟아진다. 특히 지난해 내내 그들은 ‘파업만 하면서 경제를 망치는 주범’이며 ‘비정규직들의 고통은 나 몰라라 하고 1년에 5천만원씩 받는 노동귀족들’이라는 비난과 함께 신문 1면에 등장하곤 했다. 그들과 그 가족은 정말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줄까?

『현대가족 이야기』, 조주은 지음, 이가서 · 퍼슨웹 펴냄

노동자의 아내 18명, 6개월 동안 만나

여성학자 조주은씨가 쓴 <현대가족 이야기>는 독자들을 현대차 노동자들의 집 거실로 이끌어 그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그렇다고 지레 겁내진 마시라. 이 책은 무조건 ‘한국 개발신화의 상징’이자 ‘노동운동의 전설’인 현대차 3만8천명 노동자들을 편들거나 비판하려는 책이 아니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이 책의 복잡한 시선은 지은이의 ‘개인사’에서 출발한다.

서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1980년대 말 대학을 다닌 조주은씨는 ‘비운동권’의 비교적 ‘평탄한’ 대학생활을 보낸 뒤 잇따라 무역회사와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하면서 대학시절 책에서만 보았던 착취와 차별이 무엇인지를 직접 본다. 그리하여 남들이 ‘운동’을 ‘정리’하느라 바쁘던 시절 뒤늦게 진보운동에 뛰어든 그는 그곳에서 남편을 만나 현대차 생산직 노동자의 부인이 되었다. 낯선 도시 울산, 노조 간부로 성장해가는 남편 옆에서 그는 알 수 없는 갈증에 시달린다. 12시간 맞교대 야근을 하고 새벽에 돌아와 잠드는 남편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연년생 아이들을 업고 유모차에 태운 채 하루 종일 공원과 거리를 헤매던 그녀는 같은 이유로 그곳에 모여든 수많은 젊은 엄마들을 만난다. 공원 벤치나 후미진 곳에 가서 젖병을 물리거나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하루를 보내고, 남편의 밥을 차려주기 위해 저녁 무렵 집으로 달려올 때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입에서는 단내가 올라오곤 했다.


결국 여성학 공부를 시작한 그는 자신 안에서 맴돌던 많은 질문들의 답을 찾기 위해, 다시 현대차 노동자들의 집단 주거지로 향한다. 그리고 노동자의 아내 18명을 6개월 동안 인터뷰해 이 책을 썼다.

‘노동자 아내들’의 개인사를 거칠게 요약하면, 대부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오빠나 남동생의 학업을 위해 공부를 포기하고 일찍부터 직장 생활을 하며 월급을 모두 아버지나 오빠에게 주었지만, 사생활에 대한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한 갑갑한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안정된 생활을 꿈꿀 수 있는’ 대기업 노동자와 결혼했다. 현재 그들은 회사에서 제공한 획일적인 아파트에서 거의 비슷한 형태로 살고 있다. 아이가 없는 여성은 그들의 집단에 끼지 못하며, 심지어 아이들도 대부분 2명으로 똑같다.

현대차 가족의 남성과 여성은 성별에 따라 완전히 나눠진 세계에서 살아간다. 남편들은 남성들만으로 구성된 작업장에서 집단적으로 일하며, 여성들은 여성과 아이들로만 구성된 공동체 안에서 살아간다. 취업도 거의 불가능한데 “한달 내내 할인점 카운터에서 일해도 남편의 하루 휴일특근 수당밖에 받지 못하는” 여성 노동의 저임금 때문이다. 이렇게 남녀로 분리된 생활은 부부 사이의 대화도 가로막는다. 아내가 뭘 물으면 남편들의 대답은 “됐다” 또는 “뭐 그리 꼬치꼬치 알라고 그러노”다. 대신 남편들은 집단적인 동료애로 똘똘 뭉치는데 그 문화는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자의 하위문화’인 동시에 ‘노래방이나 단란주점에서 삐삐아줌마와 어울려 놀며 여성을 상품화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연봉 5천만원’의 실체는 또 무엇인가? 기본급이 매우 낮고 잔업·특근 수당이 높은 임금 구조에서 ‘연봉 5천만원’을 달성하려면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잔업과 휴일특근, 12시간 맞교대 근무를 해야 한다. 수백m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자동으로 움직이는 차의 몸체 아래나 옆에 붙어 잠도 못 자고,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며 3천여점의 부품을 조립하는 고되고 지루한 노동이 그들의 ‘고임금’을 가능하게 한다.

시스템 벗어난 평등한 노동을 위하여

물론 남편들이 이런 노동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집에서 항상 대기하며 그들에게 밥을 차려주고 아이를 키우고, 위안과 안정을 제공하는 아내들의 노동이 뒷받침돼야 한다. 기업은 가족행사 등을 마련해 이런 아내들의 문화를 부추긴다. 지은이는 일하지 않는 아내를 전제로 ‘부양가족’을 위한 임금 인상률을 책정하는 노조의 정책 역시 여성들을 집 안에만 묶어두어야 이윤이 극대화된다고(공장 라인을 멈추지 않으려면 가족생활의 희생을 전제로 한 12시간 맞교대는 필수다) 생각하는 경영진과 ‘공모관계’에 있다고 지적한다.

어쨌든 중소기업 노동자에 비해 높은 임금을 기반으로 이들은 ‘중산층’을 꿈꾼다. 자식에게만은 절대로 이 짓을 물려주지 않으리라는 강한 열망을 가진 이들은 상대적 고임금을 자녀 교육에 투자한다. “남편의 1년 연봉으로 아이의 1년 유학비용을 조달할 수 있다”는 구체적인 계산도 가지고 있다.

생생한 인터뷰와 수많은 자료들을 통해 지은이가 총체적으로 그려낸 현대차 노동자 가족의 삶을 읽어가다 보면 (그들이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 있다는 특징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 사회가 권장하는 가족 ‘신화’의 축소판이며, 개인적으로는 돌파할 수 없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과 만나게 된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돌아가는 획일적인 이 삶에서 돌파구를 찾고 싶다면 우리 사회가 노동과 가족, 여성들의 일에 대한 틀을 전면적으로 새롭게 짜야만 하며, 가족의 ‘신화’를 깨고 ‘평등한 노동’을 향하는 것이 그 핵심 조건이라고 지은이는 제안한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