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점선씨와 연출가 한태숙씨의 아름다운 만남… 전시회 수익금 극단에 전하며 ‘빚’ 갚고 ‘빛’내
두 여자가 나란히 앉는다. 키가 큰 이는 털썩 앉더니 발을 앞으로 내어 쭉 편다. 그의 어깨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조그마한 이는 다리를 얌전히 오므린다. 화가 김점선(58)씨, 연출가 한태숙(54)씨. 앉은 모양새만 봐도 두 사람은 전혀 다르다. 당장 이름으로 따져보자. 한태숙씨가 이끄는 극단은 ‘물리’. 물질의 최소 단위를 다루는 극미 세계로부터 광활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사물의 기본 원리를 탐구하는 기초 과학 ‘물리’가 극단 이름이다. 그처럼 한태숙씨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질서를 지향한다. 앞뒤좌우 재고 또 재서 판단을 내리고 일을 꾸민다. 그가 이 작은 몸집과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어떻게 무대와 배우들을 장악하고 지휘하는가 물음표를 달다가도 이 치밀함 앞에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오죽하면 그의 취미조차 ‘청소’일까.
김점선씨는 소설가 박완서의 표현대로 하면 ‘아무도 길들이지 못하는 여자’이다. 2차원 평면에서 형태를 만드는 기본 요소는 점과 선. 점과 선이 만나 무수한 형태를 낳는 것처럼 그를 이끄는 힘은 내면의 자유로움이다. “내 영혼은 하늘이 내게 내린 숙제다. 평생 풀어나가야 할 대상이다. 나는 내 영혼의 시각화에 몰두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그린다.”
정말로 다른 두 사람의 따뜻한 인연
이처럼 다르고 또 다른 김점선, 한태숙 두 사람이 2004년 새해 문화계에 행복한 뉴스를 만들어냈다. 한태숙씨가 연출한 <19 그리고 80>(2월29일까지)이 상연되는 서울 대학로의 정미소극장 윗층, 정미소갤러리에서 김점선씨가 극단 물리와 한태숙씨를 후원하는 전시를 연다(2월29일까지). 그림 판매 수익금 40%를 극단에 기부하는 것이다. 예술가가 예술로써 예술가를 돕는 귀한 자리. 그림과 연극,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이 마주친 지점이 궁금해졌다.
“우린 30년 동안 서로를 잘 모르고 지냈어요.”
사실 두 사람은 낯선 사이였다. 친구의 친구를 통해 바람결로 소식을 전해 듣는 정도였고, 길에서 만나도 속으로만 ‘아~ 저 사람이 그 사람이군’ 하며 스쳐갈 뿐, 말도 붙여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팔팔했던 20대에 서로 받은 인상은 강렬했다. “프랑스문화원이 있던 사간동에서 인사동까지, 그곳에서 ‘김점선 사단’과 ‘한태숙 사단’이 자주 마주쳤죠.” 예나 지금이나 운동화와 청바지 차림에 스스로 삐죽삐죽 머리를 자른 김점선씨를 만나면 한태숙씨는 ‘기인이 지나가는구나’ 했고, 김점선씨는 ‘저 차돌맹이 같이 생긴 작은 여자가 연출을 한다지’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당시 두 사람이 자주 드나들었던 프랑스문화원은 해외 문화를 체험하는 통로가 딱히 없었던 젊은이들에게 ‘문화 영양제’를 주사하던 곳이었다. “영화 한편 보려고 줄을 길게 늘어서서 작은 종이쪽지를 받아서 들어갔어요. 편안한 좌석에 앉아 커다란 스크린에 영어 자막이 달린 프랑스 영화를 보는 게 얼마나 행복했던지.” 영화에 빠졌던 시절… 말 걸기까지 30년 그때만 해도 두 사람은 영화에 미쳐 있었다. 김점선씨는 대학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도 직접 영화를 만들었고(1975년 제작·연출한 <홍씨 상가>는 그의 대표적 실험영화로 알려졌다), 한태숙씨는 하길종 감독 밑에 들어가 <바보들의 행진> 조연출을 맡았다. 영화는 도전적인 작업이었지만, 보통 힘겨운 게 아니었다. “한마디로 영화판은 참혹한 상황이었어요. 영화 만들다가 돈 떨어지면 배우고 스태프고 하길종 감독 부인 전채린(전혜린의 동생)씨 집에서 죽치고 마냥 기다리곤 했지요.”(한태숙) “어머니가 졸업을 맞아 좋은 코트 한벌 사라고 꽤 많은 돈을 주셨는데, 그걸로 몽땅 필름을 사서 돌렸지. 그런데 나중에 현상소에서 받아보니 먹통으로 나온 거야. 기계도 나쁘고 돈도 없고, 고달프고. 그래서 카메라가 고양이 눈처럼 예민해지는 하이 테크닉의 날이 오기 전까지는 난 영화는 절대 안 찍겠다 다짐하고 털었지.”(김점선) 그렇게 영화를 접었지만, 두 사람 모두 미련이 많다. “나중에 꼭 한번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한태숙씨의 말에 김점선씨가 응수한다. “야, 그러려면 우리 수명이 되게 길어야 해. 연극인이 만든 영화, 화가가 만든 영화. 아, 그걸 정미소에서 돌리면 참 재밌겠다.” 30대에 접어들며 두 사람은 얼마 동안 공식적으론 문화계와 거리를 두고 살았다. “결혼하고 아기낳고 기저귀 빨며 시간을 보냈지.” 1979년 첫아들을 낳은 김점선씨는 조용히 그림을 그렸고, 한태숙씨는 10년 동안 방송작가로 생계를 꾸렸다. 이후 김점선씨는 1983년 첫 개인전 이래 지금까지 30차례의 개인전을 거듭하며(이번에 열리는 후원 전시가 31번째 개인전이다) 명성을 쌓아갔고, 한태숙씨는 1994년 <그 자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로 재기한 뒤 <레이디 맥베스> <광해유감> <창극 논개> 등 굵직굵직한 작품들을 연출했고, 2003년 <서안화차>로 김상열 연극상, 평론가협회 베스트쓰리상 등을 휩쓸었다.
“내가 그림을 내서 연극을 돕고 싶다”
“우리가 이번에 ‘정면’으로 만나게 된 것은 <서안화차> 때문이었어요.”
지난해 10월19일 김점선씨는 친구의 권유로 우연히 한태숙씨가 극본을 쓰고 연출한 <서안화차>의 마지막 공연을 보게 됐다. “무대 1층에선 현재가, 2층에선 과거의 시간이 흐르며 극이 진행되는데, 그 느낌이 마치 움직이는 회화, 움직이는 조각 같았어. 그 작은 공간에서 몇십년이 흘러가고 군중들이 움직이고 역사와 사회가 꿈틀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지.” 감동 때문에 그는 공연 직후 열린 ‘극단 물리 후원의 밤’에도 자연스럽게 참석하게 됐다. 그리고 이날 사회를 맡은 윤석화(객석 대표)씨가 마이크를 넘기자마자 “내가 그림을 내서 돕고 싶다”고 폭탄선언을 해버리고 말았다. “말만 해도 너무 고마운 제안이었죠. 사실 그런 말은 유야무야되기 쉬운 법인데, 한번 뱉은 말은 끝까지 책임져야 속이 풀리는 김점선 선생님은 다르시더라고요.” 지난 몇달 동안 한태숙씨는 전시회에 출품하는 작품을 고르기 위해 여러 번 김점선씨의 집을 찾았다. “이 사람은 몇십년 동안 그림을 어떻게 그려왔나 궁금했어요.” 집안 구석구석 쌓인 그림들을 들춰보며 한태숙씨는 이렇게 읊조렸다고 한다. ‘김점선, 죽지 마! 그리고 늙지 마!’ 예술가는 서로를 알아본다고 해야 하나. 김점선씨는 한태숙씨가 고른 작품들은 화상들의 기준과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화상들은 대중적·상업적 기준에서 잘 팔릴 그림들을 기가 막히게 알아내지. 한태숙씨가 눈길을 준 작품들은 내가 그동안 속으로만 좋아했던 그림들이야.”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 중 80호(약 145.5cmX89.4cm) 크기의 보라색 말 그림은 15년 동안 김점선씨가 거실 정면에 걸어두고 아껴오던 것이다. “처음에는 8점 정도만 내려고 했었는데, 시간을 두고 준비하다보니 꼭 보이고 싶다는 그림이 많아져 유화·드로잉·판화 합해 30점을 내게 되었어.” 젊은 날 ‘공간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며 김점선씨는 연극인을 후원하는 전시회를 통해 자기가 그동안 세상에 져왔던 ‘빚’을 갚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도 말한다. 그가 졌던 마음의 빚은 특히 건축가 김수근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현대음악이라고는 좀체 접할 기회가 없던 시절, 김수근은 ‘공간사랑’이라는 문화공간을 열었지. 72년 5월부터 매달 15일마다 현대음악 감상회를 열었는데, 강석희·김영동 같은 이름난 이들이 해설을 맡아 따끈따끈한 연주녹음들을 들려주었지. 입장료도 무료인데 커피에 예쁜 쿠키도 한두개 얹어 공짜로 주었어. 미처 공사가 다 끝나지도 않아 자갈과 모래가 한쪽에 쌓인 곳에서 우리는 현대음악이란 것을 처음으로 접했어. 김수근은 민방위훈련 사이렌이 울리는 15일이면 분단이나 독재나 그런 거 잠깐 잊어두고 음악 들으러 오는 날을 꼭 기억하라고 말했지.” 그는 설비관과 시멘트 벽돌이 그대로 드러난 갤러리정미소의 ‘덜된 느낌’이 삼십년 전 ‘공간사랑’과 비슷해서 더욱 마음에 든다고 했다. “꼭 어렸을 적 놀던 옛집에 온 기분이야. 이젠 우리도 젊은이들한테 많이 베풀고 돌려줘야 할 나이잖아.” 글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무대에서 받은 감동을 전시회로 답하련다.” 우정의 예술로 손을 맞잡은 화가 김점선씨(왼쪽)와 연출가 한태숙씨.
이처럼 다르고 또 다른 김점선, 한태숙 두 사람이 2004년 새해 문화계에 행복한 뉴스를 만들어냈다. 한태숙씨가 연출한 <19 그리고 80>(2월29일까지)이 상연되는 서울 대학로의 정미소극장 윗층, 정미소갤러리에서 김점선씨가 극단 물리와 한태숙씨를 후원하는 전시를 연다(2월29일까지). 그림 판매 수익금 40%를 극단에 기부하는 것이다. 예술가가 예술로써 예술가를 돕는 귀한 자리. 그림과 연극,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이 마주친 지점이 궁금해졌다.

김점선씨가 전시회에 내놓은 작품.
사실 두 사람은 낯선 사이였다. 친구의 친구를 통해 바람결로 소식을 전해 듣는 정도였고, 길에서 만나도 속으로만 ‘아~ 저 사람이 그 사람이군’ 하며 스쳐갈 뿐, 말도 붙여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팔팔했던 20대에 서로 받은 인상은 강렬했다. “프랑스문화원이 있던 사간동에서 인사동까지, 그곳에서 ‘김점선 사단’과 ‘한태숙 사단’이 자주 마주쳤죠.” 예나 지금이나 운동화와 청바지 차림에 스스로 삐죽삐죽 머리를 자른 김점선씨를 만나면 한태숙씨는 ‘기인이 지나가는구나’ 했고, 김점선씨는 ‘저 차돌맹이 같이 생긴 작은 여자가 연출을 한다지’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당시 두 사람이 자주 드나들었던 프랑스문화원은 해외 문화를 체험하는 통로가 딱히 없었던 젊은이들에게 ‘문화 영양제’를 주사하던 곳이었다. “영화 한편 보려고 줄을 길게 늘어서서 작은 종이쪽지를 받아서 들어갔어요. 편안한 좌석에 앉아 커다란 스크린에 영어 자막이 달린 프랑스 영화를 보는 게 얼마나 행복했던지.” 영화에 빠졌던 시절… 말 걸기까지 30년 그때만 해도 두 사람은 영화에 미쳐 있었다. 김점선씨는 대학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도 직접 영화를 만들었고(1975년 제작·연출한 <홍씨 상가>는 그의 대표적 실험영화로 알려졌다), 한태숙씨는 하길종 감독 밑에 들어가 <바보들의 행진> 조연출을 맡았다. 영화는 도전적인 작업이었지만, 보통 힘겨운 게 아니었다. “한마디로 영화판은 참혹한 상황이었어요. 영화 만들다가 돈 떨어지면 배우고 스태프고 하길종 감독 부인 전채린(전혜린의 동생)씨 집에서 죽치고 마냥 기다리곤 했지요.”(한태숙) “어머니가 졸업을 맞아 좋은 코트 한벌 사라고 꽤 많은 돈을 주셨는데, 그걸로 몽땅 필름을 사서 돌렸지. 그런데 나중에 현상소에서 받아보니 먹통으로 나온 거야. 기계도 나쁘고 돈도 없고, 고달프고. 그래서 카메라가 고양이 눈처럼 예민해지는 하이 테크닉의 날이 오기 전까지는 난 영화는 절대 안 찍겠다 다짐하고 털었지.”(김점선) 그렇게 영화를 접었지만, 두 사람 모두 미련이 많다. “나중에 꼭 한번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한태숙씨의 말에 김점선씨가 응수한다. “야, 그러려면 우리 수명이 되게 길어야 해. 연극인이 만든 영화, 화가가 만든 영화. 아, 그걸 정미소에서 돌리면 참 재밌겠다.” 30대에 접어들며 두 사람은 얼마 동안 공식적으론 문화계와 거리를 두고 살았다. “결혼하고 아기낳고 기저귀 빨며 시간을 보냈지.” 1979년 첫아들을 낳은 김점선씨는 조용히 그림을 그렸고, 한태숙씨는 10년 동안 방송작가로 생계를 꾸렸다. 이후 김점선씨는 1983년 첫 개인전 이래 지금까지 30차례의 개인전을 거듭하며(이번에 열리는 후원 전시가 31번째 개인전이다) 명성을 쌓아갔고, 한태숙씨는 1994년 <그 자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로 재기한 뒤 <레이디 맥베스> <광해유감> <창극 논개> 등 굵직굵직한 작품들을 연출했고, 2003년 <서안화차>로 김상열 연극상, 평론가협회 베스트쓰리상 등을 휩쓸었다.

한태숙씨가 극본을 쓰고 연출한 연극 <서안화차>.
지난해 10월19일 김점선씨는 친구의 권유로 우연히 한태숙씨가 극본을 쓰고 연출한 <서안화차>의 마지막 공연을 보게 됐다. “무대 1층에선 현재가, 2층에선 과거의 시간이 흐르며 극이 진행되는데, 그 느낌이 마치 움직이는 회화, 움직이는 조각 같았어. 그 작은 공간에서 몇십년이 흘러가고 군중들이 움직이고 역사와 사회가 꿈틀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지.” 감동 때문에 그는 공연 직후 열린 ‘극단 물리 후원의 밤’에도 자연스럽게 참석하게 됐다. 그리고 이날 사회를 맡은 윤석화(객석 대표)씨가 마이크를 넘기자마자 “내가 그림을 내서 돕고 싶다”고 폭탄선언을 해버리고 말았다. “말만 해도 너무 고마운 제안이었죠. 사실 그런 말은 유야무야되기 쉬운 법인데, 한번 뱉은 말은 끝까지 책임져야 속이 풀리는 김점선 선생님은 다르시더라고요.” 지난 몇달 동안 한태숙씨는 전시회에 출품하는 작품을 고르기 위해 여러 번 김점선씨의 집을 찾았다. “이 사람은 몇십년 동안 그림을 어떻게 그려왔나 궁금했어요.” 집안 구석구석 쌓인 그림들을 들춰보며 한태숙씨는 이렇게 읊조렸다고 한다. ‘김점선, 죽지 마! 그리고 늙지 마!’ 예술가는 서로를 알아본다고 해야 하나. 김점선씨는 한태숙씨가 고른 작품들은 화상들의 기준과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화상들은 대중적·상업적 기준에서 잘 팔릴 그림들을 기가 막히게 알아내지. 한태숙씨가 눈길을 준 작품들은 내가 그동안 속으로만 좋아했던 그림들이야.”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 중 80호(약 145.5cmX89.4cm) 크기의 보라색 말 그림은 15년 동안 김점선씨가 거실 정면에 걸어두고 아껴오던 것이다. “처음에는 8점 정도만 내려고 했었는데, 시간을 두고 준비하다보니 꼭 보이고 싶다는 그림이 많아져 유화·드로잉·판화 합해 30점을 내게 되었어.” 젊은 날 ‘공간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며 김점선씨는 연극인을 후원하는 전시회를 통해 자기가 그동안 세상에 져왔던 ‘빚’을 갚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도 말한다. 그가 졌던 마음의 빚은 특히 건축가 김수근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현대음악이라고는 좀체 접할 기회가 없던 시절, 김수근은 ‘공간사랑’이라는 문화공간을 열었지. 72년 5월부터 매달 15일마다 현대음악 감상회를 열었는데, 강석희·김영동 같은 이름난 이들이 해설을 맡아 따끈따끈한 연주녹음들을 들려주었지. 입장료도 무료인데 커피에 예쁜 쿠키도 한두개 얹어 공짜로 주었어. 미처 공사가 다 끝나지도 않아 자갈과 모래가 한쪽에 쌓인 곳에서 우리는 현대음악이란 것을 처음으로 접했어. 김수근은 민방위훈련 사이렌이 울리는 15일이면 분단이나 독재나 그런 거 잠깐 잊어두고 음악 들으러 오는 날을 꼭 기억하라고 말했지.” 그는 설비관과 시멘트 벽돌이 그대로 드러난 갤러리정미소의 ‘덜된 느낌’이 삼십년 전 ‘공간사랑’과 비슷해서 더욱 마음에 든다고 했다. “꼭 어렸을 적 놀던 옛집에 온 기분이야. 이젠 우리도 젊은이들한테 많이 베풀고 돌려줘야 할 나이잖아.” 글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