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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교칙에 갇혀 있는 종교의 자유/ 전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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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1-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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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와 함께하는 예컨대 | 채플 의무수강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가]

전해준/ 인하대 부속고 2학년

민주주의가 그러하듯 종교의 자유 또한 피를 먹고 자라났다. 예로부터 종교를 둘러싼 갈등은 일체의 양보 없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결국 한쪽이 끝장이 나야 마무리지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종교 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러한 종교간 갈등은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에서 기인한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기독교 재단 대학의 채플 의무수강도 학생들의 종교에 대한 배타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대학생들의 저항도 한치의 양보 없이 전개되고 있어 극한의 대립으로 치달을 기미가 보이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 황은아
대학쪽 주장의 요지는 교칙에 채플 의무수강이 명시되어 있는 만큼 그 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은 교칙에 대한 암묵적 동의로 간주되므로 채플 의무수강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의 자유’는 교칙이라는 울타리 내로 그 범주가 국한된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20조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대한민국 국민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행동할 권리가 있고, 또한 그로 인해 일체의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종교적 신념에 따라 채플을 수강하지 않을 경우 졸업장조차 받을 수 없다는 교칙은 명백한 위헌적 조항이라 할 수 있다.

무릇 종교는 인생의 조타수이다. 개인의 언행, 가치관, 삶의 목표 등 정신세계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할 대학들이 졸업장을 담보로 개인의 정신체계를 옭아매려 하는 것은 엄연한 정신적 구속이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받들어야 할 기독교 재단이 그들과 다른 종교라는 이유만으로 학생들의 내적 세계에까지 마수를 뻗치고 있는 작태는 자기모순에 다름 아니다.


주지하듯 종교는 신앙의 진정성을 생명으로 한다. 그러나 지난 2002년 채플수강에 관한 의견을 묻는 연세대의 설문조사 결과, 38.3%가 ‘졸업을 위한 패스학점’, 20.5%가 ‘무가치한 강제시간’으로 답했다고 한다. 또한 돈을 매개로 채플 대리출석 아르바이트 거래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채플시간을 그저 ‘시간 때우기’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비합리적 제도하에서는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의 진정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로버트슨은 한 사회 안에서 종교인구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사회는 실제로 종교적 원리에 따라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개인의 종교성과 사회체계의 종교성을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대학이라고 하는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강제로 채플을 수강하도록 해도 그 안에서 참된 믿음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기독교는 특유의 ‘무차별적 교세 팽창욕’이 있다. 땅거미가 내리면 마치 교세를 과시하기라도 하듯 유럽에선 찾아보기 힘든 십자가가 빨갛게 어둠을 밝히고, 지하철에서는 ‘예수 믿고 천당 가라’며 열변을 토하는 열성적 신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기독교 재단 학교쪽의 채플 의무수강 요구 또한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들에게 예수를 믿을 권리가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을 권리도 있는 것이다. 이같은 문어발식 교세 확장은 자칫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켜 ‘예수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고착화시킬 우려가 있다. 이는 진정으로 한국 기독교를 위한 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바야흐로 ‘종교적 데탕트’를 맞이하였다. 일부 몰지각한 기독교 신자들이 불상의 머리를 잘라가는 어처구니없는 사건도 잦아들고 있다. 스님이 성탄절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내주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기독교 재단 대학들은 이같은 시대적 흐름에 눈을 뜨고 이분법적 논리에 근거한 ‘종교적 타자화’를 중지해야 할 것이다. - 전해준/ 인하대 부속고 2학년

[ 칭찬과 아쉬움 ]

‘채플 의무수강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가’를 묻는 예컨대 논술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종교를 갖지 ‘않을’ 자유를 옹호하는 글을 보내왔다. 학생들은 한목소리로 일부 기독교 대학의 채플 의무수강 제도가 한국 기독교의 배타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비판했다. 수준작들은 적지 않았으나 글의 내용부터 논조까지 다양성이 부족한 한주였다.

이주의 ‘예컨대’로는 인하대 부속고 전해준 학생의 글이 뽑혔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채플 의무수강 반대 논리를 풀어갔다. 헌법에 명시된 종교의 자유, 설문조사 결과 나타난 채플 의무수강의 문제점 등이 그가 제시한 논거다. 그의 논거와 논리 전개방식이 세련되거나 파격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글은 적절한 논거를 적절한 단락에 배치해 논리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유려하다. 무엇보다 단정한 문장과 간결한 비유가 빛난다. 학생들의 글에서 자주 화려한 글 치장이 어색한 문장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본다. 무리한 비유가 글의 흐름을 오히려 방해하는 일도 적지 않다. 그런 면에서 전해준 학생의 문장은 모범이 될 만하다.

다만 결론 부분이 아쉽다. 전해준 학생은 ‘종교적 데탕트’라는 열쇠말로 결론을 맺고 있다. 결론이 선언처럼 보이지 않으려면 충분한 논리가 뒷받침돼야 한다. 그러나 이 열쇠말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단 두 문장으로 끝나버렸다. 바로 앞부분까지 ‘종교적 데탕트’와는 관련 없는 한국 개신교에 대한 비판 등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앞 단락을 조금 줄이고, 마지막 단락을 보강하는 편이 논리적 완결성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대전 보문고 유성민 학생은 불교 학교에 다니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풀어갔다. 그의 요지는 채플 수강을 강요하는 기독교 대학의 태도가 타자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예수의 가르침과도 상반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활에서 우러난 경험에 바탕을 둔 글이어서 평균적인 설득력은 있지만, 경험이 보편으로 확산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서울 용화여고 이윤아 학생은 ‘점수 맞춰서’ 대학 가는 한국 현실에서 채플 때문에 대학 선택의 자유가 제한돼서는 안 된다는 현실론을 주장했다. 더구나 졸업에 지장을 받아서는 더더욱 안 된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학문의 전당인 대학이 종교의 자유를 제한해 학생들의 학문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다른 학생의 글에서도 자주 나오는 논리였다. 이윤아 학생의 글은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들어가다 보니, 논리의 구성이 세련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광주 대성여고 손모아 학생의 글은 일단 글의 길이가 짧고, 논리 구성의 짜임새가 부족했다.

인천고 최진헌 학생도 최근 프랑스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수업 중 차도르 착용금지’와 채플수강을 연결한 글을 보내왔다. 그의 글은 다양한 논거에 바탕을 둔 풍부한 내용을 자랑한다. 그러나 어법과 단어 사용에서 지적받을 점이 있다. 우선 가치의 함양, 자충수, 맹목적, 타율적 등 지나친 한문 어투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한문 어투는 글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하고, 자칫 자기 과시적인 글로 보일 수 있다. 되도록이면 쉬운 말을 사용하는 것도 논술의 기초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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