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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나찾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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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1-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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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탄내와 군고구마 냄새 가득한 찻집(이곳을 통해 소개된 바 있는)에 들어서니 염산 사는 미화, 영광읍에서 고추장사 하는 영인씨가 동동주 잔 기울이다 들뜬 반가움으로 맞이한다.

“언니, 작년 정초에 ‘나찾녀’ 마지막 모임을 하며 회비 다 써불라도 열심히 먹어댔는데 통장 정리를 하다본께 잔고가 20여만원이나 남아 있네. 아무래도 올해 해체모임 또 해야 쓸란갑네.” “징허게 해체당하기 싫은 갑다. 얼굴 보기 힘든 정남씨나 혜숙씨도 꼭 챙겨서 나오게 연락해봐”라며 나찾녀 총무 영인씨에게 당부하고 설 명절 3일 전으로 날을 잡았었다.

일러스트레이션 | 경연미
벌써 10년 전인가 보다.

농민운동 하겠다고 농촌으로 내려와서 “내가 밥순인가? 농사만 지으려고 촌에 왔나? 당신만 운동해? 나도 여성 농민들 조직해야 한다고”하며 각개격파로 남편과 싸워대던 여성들이 하늘 아래 첫 동네인 백수읍 길룡리 명례네 집에서 첫 모임을 하고 격렬한 고민 끝에 탄생한 이름이 ‘나를 찾는 여성들의 모임’이었다.

줄임말인 ‘나찾녀’는 다소 어색해도 결혼 횟수나, 출산과 육아 경험, 농촌생활 경력이 고만고만했던 우리들에겐 딱 맞는 이름이었다.

농촌에 사는 젊은 여성들이 딱히 마음 둘 곳 없어 정신적 공황에 헤맬 때 농촌으로 시집온, 또는 고향에서 결혼한 토박이, 그리고 나처럼 농민운동에 삶을 걸고 내려온 아홉이 모임을 꾸리고 이후 두엇의 후배 여성들로 풍성해지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의 세월이란다.

“올해 염전 농사는 어땠어?” “죽쒔지 뭐, 비가 많이 와서 세 주고 나면 거지라니까.” 염전밭에서 몇년째 구르느라 새까매진 정남씨는 그 험하다던 염전 일에 이력이 붙었나 보다.


“미화네는 김 농사 한다더니 어찌됐냐?” “올해는 준비만 하고 내년부터나 본격적으로 할 것 같아.”

어쩌다가 영광댁들이 되어버린 서울여자 정남씨, 미화씨가 새로운 농사거리 부여잡고 씨름하는 폼이 눈에 선하다.

“손님 안 왔음 좋겠다”며 찻집 주인의 본분을 잃고 급히 동동주 한잔 들이켜고 주방으로 옮겨가던 경아 눈이 창밖에 고정된다. 손님과 함께 따라들어온 눈발에 ‘나찾녀’ 아줌마들 동시에 탄성 지르고 제일 나이 많은 혜정 언니와 내가 창가로 쪼르르 내달린다.

“만나니 이리 좋은데 누가 나찾녀 깨자 그래? 일년에 한번이라도 만나서 생사 확인하게.”

“그래 올해도 해체하긴 글렀다. 내년에 또 모여보게. 자, 다들 회비 내소”라며 총무 영인씨 1만원씩 거둬들인다. 몇해 전 서울로 이사간 명례, 영광 최초의 여성 우편배달부가 된 경희 빼고 열명 모두 모인 ‘나찾녀’ 아줌마들 호기롭게 인생을 함께 채우자고 했던 옛 동지들과의 정담에 취해 까만 밤이 흰 눈에 홈뻑 둘러싸여도 돌아갈 줄 모른다.

밤늦게야 영인씨 남편이 사온 보성 꼬막 맛까지 보고서야 먼길 가야 하는 순서대로 자리를 일어서고 할 말 많은 서너명이 남아 날밤을 꼬박 새웠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다음날…

명례가 서울서 설 쇠러 친정 왔다는 소식에 내년에나 만나기로 했던 ‘나찾녀’들 다시금 찻집으로 부리나케 모여들고 훌쩍훌쩍 커버린 하늘이, 인혜, 한별이, 영후, 성호, 현재, 승혁이… ‘나찾녀’ 자손들의 회합도 꽤나 길게 이어질 폼이다.

이태옥 | 영광 여성의 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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