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탕한 웃음소리로 다시 우리 곁을 찾아온 개그우먼 이경실의 ‘진짜 프로’다운 내공
지난해 초, 그녀 본인은 물론이요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을 당했다. 난 마침 그녀를 이 지면에 모시고 싶어했던 터라 적잖게 당황했더랬다. 난 그녀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이 누그러지길 기다려야만 했다. 웬만해선 잊혀지기 힘들 것 같은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역시 ‘남의 일’인지라 사람들의 관심은 차차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소리와 항상 당당한 자세, 그리고 무엇보다 재치 있는 진행솜씨에 반했던 난 그녀의 존재 자체까지 잊혀지는 건 아닌가 내심 불안했더랬다.
중1 때 담임과 싸우고 두달간 입원한 사연
그건 기우였다. 그녀의 호탕한 웃음소린 다시 우리 곁을 찾아왔다. “왜? 무슨 일 있었어?” 하는 모습으로. 이제야 편하게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만나면 반갑게 언니, 동생 하는 사이이긴 하나 막상 찻잔을 사이에 두고 앉으니 내가 아는 건 고작 프로 이경실뿐, 자연인 이경실에 대해선 모르는 거투성이였다. 잠시 쉬었던 아픈 기간 동안 독심술을 연마했는지 묻지도 않은 자신의 어린 시절 얘길 해줬다.
군산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진 남부럽지 않게 살면서 항상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명랑하고 활기찬 소녀였다. 허나 큰언니와 나이 차이가 열여섯살이나 나는 형제의 막내였던 그녀는 아버지가 중1 때 정년퇴직을 하면서 가난이라는 걸 조금씩 알게 된다. 탁구 코치였던 큰오빠의 월급으로 대식구가 빠듯하게 살아가던 중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자리에 누우신 뒤론 수업료를 제때 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건 참을 수 있었다. 씩씩하고 자존심 센 그녀였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 건 선생님의 편애였다. 중1 때였다. 깜박하고 교과서를 안 가져갔는데 하필 짝도 안 가져왔더란다. 평상시 짝아이 엄마로부터 갖은 치맛바람을 맞던 늙은 담임은 똑같이 책을 안 가져온 짝아이에겐 부드러운 표정으로 “학생이 책을 안 가져오는 건 총 없이 전쟁터에 오는 거란다” 하더니 자신에겐 표가 날 정도로 야멸차게 ‘정신머리가 글러먹은 애’라고 야단쳤다. 억울함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그녀는 벌떡 일어나 ‘차별’을 항의했고 못생긴 권위를 짓밟힌 선생은 그녀의 볼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녀는 숨이 넘어가게 대성통곡을 했고 두달 뒤 그 후유증으로 뇌막염을 앓아 두달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고딩 시절 3년 내내 어머닌 아버지 대신 돈을 벌러 다녔고 아버지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건 그녀의 몫이었다. 대학은 무조건 서울로 가야 한다고 결심한다. 다행히 실력이 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버지 뒤치다꺼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핑곗거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우연히 여성잡지에서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이란 작품으로 화려하게 충무로에 데뷔한 여성감독 이미례에 관한 기사를 읽고 영화연출이 재밌겠다 싶어 동국대 연극영화과 영화연출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한다. 어렸을 때부터 어디 가나 ‘썰’ 푸는 거엔 자신 있던 그녀는 대학 면접 때 아는 거 모르는 걸 죄 끄집어내서 교수들을 홀딱 반하게 했다. 돈 없으면 못 다니는 데인 줄 오해하고 아버지가 사업을 하신다고 ‘뻥’까지 쳤다고 그때 이야기를 하는 그녀 모습이 개구쟁이 같았다.
대학엘 들어가자마자 본 최민식과 한석규 선배의 공연은 그녀의 학창시절을 연극에 미쳐 보내게 했지만 용돈은커녕 등록금조차 자신이 벌어서 써야 했던 여대생 이경실은 당시 상금이 꽤 높았던 개그맨 시험을 보고 덜컥 붙는다. 그 뒤 어찌어찌 살다보니 한국 최고의 개그우먼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 그녀는 쉴 새 없이 자신의 옛이야기들을 들려줬다. 마치 오래 전부터 나에게 이 얘길 들려주고 싶었다는 듯이. 그러고선 또 묻지도 않은 이혼 얘길 해줬다.
이경실을 보호하는 모임을 만들자고?
세인들이 아는 것만큼 잉꼬부부는 아니었지만 대화도 제대로 못해보고 언론에 떠밀리다시피 이혼을 하게 돼서 결론보다는 과정이 아쉽다고 힘들게 운을 뗐다. 이젠 마음의 정리가 됐다고 말하면서도 지면으로 옮기긴 어려운 얘기들을 참 많이도 해줬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봤다. 부부의 일이란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들 한다. 게다가 스무살 때부터 서로를 봐온 사이일 테니 그보다 더한 일을 당했다 하더라도 그 징그러운 인연의 끈을 단박에 잘라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의 직업이 웃고 웃기는 직업인 게 이렇게 다행스럽게 생각돼본 적도 없다고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음의 회복이 이렇게 빨리 진척이 되진 않았을 거라고 쓸쓸히 얘기하는 그녀를 보면서 그녀의 호흡 속에 남아 있는 애증의 찌꺼기가 한없이 처연해 보였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동정하는 건 결코 아니다. 지난해 어느 여성단체에서 주최한 모임에 갔다가 그녀들이 강금실 장관 지킴이를 발족하면서 동시에 이경실을 보호하고 지키는 모임도 만들고 싶다고 하기에 말린 적이 있었다. 그녀는 그들의 보호가 필요할 정도로 나약한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난 오히려 그네들이 그녀에게 어설픈 위로를 해주려 하다가 그녀의 당당함과 프로로서의 자긍심에 기나 죽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보통 연예인 커플들의 안 좋은 뉴스를 보면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데, 속이야 어쨌든 황색 저널리즘에 먹잇감으로 이용되진 않는 것만 봐도 그녀의 자존심이 얼마나 견고한지 알 수 있다. 그녀는 강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녀는 가정폭력의 피해자 입장보다는 부정한 아내로 오해받았던 것에 더 괴로워한다는 점이었다. 스무살 때부터 이날까지 오로지 한 남자만 알고 살아왔기에 일반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정숙(?)한 그녀로서는 억울하기도 하겠지만 솔직히 난 그녀의 사생활은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 내가 정말 궁금한 건 ‘맞을 짓’을 했으니 맞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이었다. 해도 되는 전쟁이란 있을 수 없듯이 ‘맞을 짓’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큰 숙제는 앞으로 혼자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란다. 이 일을 과연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불안하기도 하다는 거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라 언제 무슨 이유로 팬들의 내침을 당할지 알 수 없는 모든 딴따라들의 공통된 걱정거리일 것이다.
“용서할 순 없지만 이해할 순 있다”
그녀가 자신의 40년 가까운 인생을 단 두 시간으로 압축해서 들려주는 바람에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의지나 프로로서의 고충에 대해선 묻지도 못하고 인터뷰를 끝내야 했다. 주문한 차가 싸늘하게 식었을 즈음 그녀는 말했다. 그를 용서할 순 없지만 이해할 순 있다고. 사랑에 척도가 있다면 용서라는 것이겠지만 이해 또한 보통의 ‘공법’으로는 불가능한 것일 게다. 사랑과 결혼도 하나의 게임이라면 난 그녀가 당당한 승자라고 믿는다.
그녀의 밝은 얼굴과 호탕한 웃음소리는 진짜로 이긴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은 ‘진짜 프로’만이 해낼 수 있는 내공인 것이다.
글 오지혜(영화배우)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군산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진 남부럽지 않게 살면서 항상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명랑하고 활기찬 소녀였다. 허나 큰언니와 나이 차이가 열여섯살이나 나는 형제의 막내였던 그녀는 아버지가 중1 때 정년퇴직을 하면서 가난이라는 걸 조금씩 알게 된다. 탁구 코치였던 큰오빠의 월급으로 대식구가 빠듯하게 살아가던 중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자리에 누우신 뒤론 수업료를 제때 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건 참을 수 있었다. 씩씩하고 자존심 센 그녀였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 건 선생님의 편애였다. 중1 때였다. 깜박하고 교과서를 안 가져갔는데 하필 짝도 안 가져왔더란다. 평상시 짝아이 엄마로부터 갖은 치맛바람을 맞던 늙은 담임은 똑같이 책을 안 가져온 짝아이에겐 부드러운 표정으로 “학생이 책을 안 가져오는 건 총 없이 전쟁터에 오는 거란다” 하더니 자신에겐 표가 날 정도로 야멸차게 ‘정신머리가 글러먹은 애’라고 야단쳤다. 억울함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그녀는 벌떡 일어나 ‘차별’을 항의했고 못생긴 권위를 짓밟힌 선생은 그녀의 볼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녀는 숨이 넘어가게 대성통곡을 했고 두달 뒤 그 후유증으로 뇌막염을 앓아 두달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고딩 시절 3년 내내 어머닌 아버지 대신 돈을 벌러 다녔고 아버지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건 그녀의 몫이었다. 대학은 무조건 서울로 가야 한다고 결심한다. 다행히 실력이 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버지 뒤치다꺼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핑곗거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우연히 여성잡지에서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이란 작품으로 화려하게 충무로에 데뷔한 여성감독 이미례에 관한 기사를 읽고 영화연출이 재밌겠다 싶어 동국대 연극영화과 영화연출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한다. 어렸을 때부터 어디 가나 ‘썰’ 푸는 거엔 자신 있던 그녀는 대학 면접 때 아는 거 모르는 걸 죄 끄집어내서 교수들을 홀딱 반하게 했다. 돈 없으면 못 다니는 데인 줄 오해하고 아버지가 사업을 하신다고 ‘뻥’까지 쳤다고 그때 이야기를 하는 그녀 모습이 개구쟁이 같았다.

이경실씨는 오지혜씨와 언니, 동생 하는 사이. 그는 이제 마음의 정리가 됐다면서 지면으로 옮기기 어려운 얘기들도 많이 해줬다.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