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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책갈피] 표준어는 차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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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1-1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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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문학자 고모리 요이치 교수의 <일본어의 근대>]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사기꾼이나 깡패는 대부분 사투리를 쓴다. 또한 우아하고 지적인 주인공이 사투리를 쓰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영화 <황산벌>에서 영호남의 사투리를 쓰는 김유신과 계백이 ‘언어적 충격’을 주면서 잠시 사투리가 유행하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그들이 꿋꿋한 영웅이라기보다는 권력의 미망에 사로잡힌 인물임을 은근히 조롱하는 거리두기 장치의 하나였다. 곰곰 생각해보면 특정 언어가 다른 언어들에 비해 우월하거나 열등할 수 없고, 서울 사람의 말이 다른 지방 말에 비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시기 이후 우리의 의식·무의식 속에서 서울말은 ‘표준어’라고 하여 모두가 강제로 사용해야 할 ‘우수한’ 언어가 되었고, 다른 지역의 말들은 ‘방언’ 혹은 ‘사투리’라는 이름으로 추방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일본 근대문학자인 고모리 요이치(小森陽一) 도쿄대학 교수의 <일본어의 근대>(소명출판)는 이러한 표준어 강제가 “근대 국민국가의 음모”라고 이야기한다. 표준어 ‘국어’는 국민 개인을 국가를 구성하는 전체 국민의 일부로 만들어 국민성(nationality)을 구성해내는 핵심이며, 국가권력과 결탁한 일본어, 일본 국민 전체가 써야 할 표준어의 발명은 근대 일본이 국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나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일본정신’을 투사함으로써 ‘일본어’를 발견한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국수주의적 언어관에 대한 비판부터 2차대전 종전 뒤 국가권력에 의해 ‘일본어’가 폭력적으로 배치되는 양상까지 국어와 근대국가의 관계를 세심하게 보여준다.

이 책이 제기하는 문제는 현재 사람들이 표준어가 의사소통에 필수적이고 편리한 도구라고 당연하게 여기지만, 국민국가가 강제하는 국어는 필연적으로 차별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한국 상황을 생각해보면 서울말이 표준어가 된다는 것은 결국 다른 지방말을 없애가는 과정이다. 국가권력은 표준어를 모든 국민에게 강조하며 의무교육은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다. 모든 교과서는 표준어인 서울말에 기초를 둔 국어로 되어 있다.

자명한 것으로 여겨졌던 표준어 안에 타자를 배제하고 동시에 지배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이 형성되어 있다는 이런 지적은 결국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비판으로 이어진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과 대만, 만주 등 식민지에서 벌였던 폭압적 언어정책은 ‘국어’의 폭력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진실로 조선과 타이완을 일본이라는 몸체의 일부분으로 삼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마음 저 깊은 곳부터 일본화해야 한다”고 말했던 일본제국의 정치가들은 식민지에서 일본어를 중심으로 한 교육, 창씨개명 등을 강제했다. 1923년 간토 대지진 때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구별해내 학살한 결정적인 단서도 일본어를 제대로 쓰는지 여부였다.

이러한 언어의 차별은 현재의 ‘한국어’ 속에도 존재하고, 영어를 숭배라는 우리의 관념 속에서도 존재한다. “언어의 다양한 웅성거림과 소란”을 인정하고, 스스로의 ‘언어’를 생산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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