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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신용불량, 불량한 사회의 책임/ 성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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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4-01-1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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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와 함께하는 예컨대 | 신용불량은 누구의 책임인가 ]

성윤오/ 인천 부평고 2학년

지난해 여름, 카드빚에 시달린 30대 주부가 세 자녀와 함께 고층 아파트 창문에서 투신한 사건은 경제난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는 극빈층의 절망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사건은 동반자살이라는 끔찍함만큼이나 많은 논란거리를 몰고 왔는데, 한쪽에서는 세 자녀를 밀어 떨어뜨렸다는 데 중점을 둔 윤리적 비판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사회안전망 부재에 중점을 둔 정책적 비판이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개인적 윤리 문제로, 후자의 경우는 사회복지 문제로 사건을 바라보았다는 데 차이가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 황은아
에밀 뒤르켕은 <자살론>에서 종래의 신학적 주장을 거부하고 사회적 현상으로서 자살을 관찰했다. 뒤르켕에게 있어서 자살은 자유의지의 남용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 사회 가치규범의 혼란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이러한 사회학적 시각은 비단 자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자살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면, 자살의 원인이 되는 사회 문제 역시 그러한 관점에서 분석과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동반자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카드빚과 대규모로 양산되는 신용불량자 문제도 사회 구조적 관점으로 설명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독일의 역사학파 경제학자인 힐데브란트는 교환 과정을 중심으로 경제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그는 여기서 마지막 단계인 ‘신용경제’가 가장 효율적이고 이상적인 경제체제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윤 추구라는 자본의 성격상 신용경제의 전개 과정은 새로운 형태의 착취 수단으로서 탈바꿈했다. 1997년 외환위기 사태는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초국적 금융자본의 신용거래가 나라 살림까지 좌지우지할 만큼의 영향력이 있음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당시 구조조정은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기업대출을 회피하도록 만들었다. 그 대신 금융기관은 적극적인 소매금융 거래를 통해서 이익률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했다. 이러한 금융기관의 불황 타계책은 경기를 활성시키기 위해 가계소비를 적극 지원한 정부 정책과 맞아떨어져 대규모의 신용불량자를 양산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심지어 카드사의 무분별한 카드 발급은 경제적 능력이 없는 미성년자에게도 해당되었고, 급기야 1만명이 넘는 10대 신용불량자를 양성했다. 신용을 통해서 실직적인 소득 능력과 무관하게 진행된 신용불량자들의 과소비 이면에는 이렇게 정부의 묵인과 장려책이 있었던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 황은아

물론, 정책의 부정적 효과를 감안하더라도 그것의 결과가 360만 신용불량자로 극명하게 나타나는 데는 오로지 국가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소득을 생각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카드를 사용하고 대출을 남용한 것은 일차적으로 개인에게 책임이 있다. 하지만 소비생활 양식에 관해 프랑스의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대중매체에 의해 주입된 일상성에 주목한다. 그의 말대로 현대 산업사회의 소비는 소비자의 주체적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광고·미디어·언론의 포로가 된 소비자의 수동적인 소비인 것이다. 또 낮은 수준의 복지 예산은 빈곤층에게 사회적 임금을 기대할 수 없도록 해 적은 임금과 빚으로 생활의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신용불량자 문제도 사회적 환경을 간과한 채 당사자의 도덕적 해이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는 것은 무리가 있다.

신용경제는 분명 화폐경제에 비해 효율적이고 경제적 약자에게 기회를 준다는 측면에서 더 발전된 경제체제이기는 하다. 하지만 모든 현상의 이행 과정엔 소외된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러한 변화 과정 속에서 각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몫이다. 따라서 국가 정책의 부정적인 영향으로 생긴 대규모의 신용불량자에 대해 개인회생제도 도입과 높은 금리를 제한하는 법의 제정, 나아가 사회 안전망을 확충하는 거시적인 문제 해결 의지가 요구된다. - 성윤오/ 인천 부평고 2학년

[ 칭찬과 아쉬움 ]

‘신용불량이 개인의 책임인가, 사회적 문제인가’를 묻는 예컨대 논술에 많은 학생들이 글을 보내왔다. 그러나 글의 양에 비해 내용의 다양성은 부족한 한주였다. 우선 글의 논조가 획일적이었다. 대부분의 글이 신용불량자를 양산한 사회구조에 비판의 중심을 두면서 개인의 책임까지 덧붙이는 흐름을 택했다. 특히 글의 첫머리는 판에 박은 듯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다 세 자녀와 함께 투신 자살한 주부의 이야기를 끌어낸 것이다. 그 배후에 늘어가는 카드빚과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가 도사리고 있다는 지적도 비슷했다.

비슷비슷한 논조의 글들 중에서 가장 짜임새가 뛰어난 글을 이번주 예컨대 글로 뽑았다. 인천 부평고 성윤오 학생은 뒤르켕의 자살론, 힐데브란트의 신용경제론, 르페브르의 일상성 이론 등을 적절히 섞어가며 신용불량이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의제임을 논증했다. 유명한 저술의 인용이 단순한 지식 과시에 그치지 않고, 글의 맥락에 녹아 들어간 휼륭한 글이었다. 아쉽다면, 서론과 결론이 평범해 보인다는 것이다. 차분한 논리를 유지하면서 함축적 비유까지 덧붙인다면 더욱 좋은 글이 될 것 같다.

항상 수준급의 글쓰기 실력을 보여주는 인천고 최진헌 학생은 이번에도 단정하게 정리된 글을 보내왔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우선 항상 매트릭스 운운하며 글을 시작하는 버릇은 바람직하지 않다. 신용카드의 기원을 담은 마지막 단락도 결론으로서 적절치 않아 보인다. 오히려 이 부분을 본론에 배치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이미 ‘예컨대’로 뽑힌 적이 있는 전해준 학생과 유성민 학생도 그들 글쓰기의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보여주는 글을 보내왔다. 대전 보문고 유성민 학생은 신용불량자를 반공정책에 희생된 실미도 부대원들에 빗대 경제정책에 희생된 내수진작의 전위대로 규정했다. 이 비유가 그의 글을 끌어가는 힘이고, 빛나게 하는 요소다. 그러나 비유로 전체 글을 이끌어가다 보니 정작 신용불량에 대한 논증은 소홀해졌다. 둘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인하대 부속고 전해준 학생도 개인워크아웃제도 등 신용불량자 대책까지 꼼꼼히 짚어가며 깊이 있는 글을 보내왔다. 다만 ‘자본주의 말기 현상’과 같은 논리상 ‘튀는’ 단어가 가끔 보이고 인상적인 비유가 부족하다는 것이 아쉽다.

독산고 김민지 학생은 2500자가 넘는 장문의 글을 보내왔다. 신용불량을 대량 양산한 사회에 대한 생생한 비판이 빛났지만, 지나치게 자신의 경험과 주변의 이야기로만 글이 채워져 논술글에 필요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는 흠이 있었다. 광주 전남고 강건택 학생의 글은 매끄러운 문장과 탄탄한 논리로 구성돼 있다. 특히 ‘자활 의지’가 있는 사람부터 지원해야 한다는 지적은 다른 학생들의 대안보다 구체적이다. 서론과 결론이 지나치게 무난하다는 단점만 극복한다면, 예컨대 글로 뽑혀도 손색이 없을 수준이다.

예컨대에 처음 글을 보내온 학생들이 유난히 많은 한주였다. 지면이 부족해 조언을 듣고 싶어하는 학생들의 글을 일일이 언급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고, 미안하다. 다음에는 ‘뉴페이스’들에게 지면을 좀더 할애할 것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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