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한 당시 구조조정은 금융기관으로 하여금 기업대출을 회피하도록 만들었다. 그 대신 금융기관은 적극적인 소매금융 거래를 통해서 이익률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했다. 이러한 금융기관의 불황 타계책은 경기를 활성시키기 위해 가계소비를 적극 지원한 정부 정책과 맞아떨어져 대규모의 신용불량자를 양산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심지어 카드사의 무분별한 카드 발급은 경제적 능력이 없는 미성년자에게도 해당되었고, 급기야 1만명이 넘는 10대 신용불량자를 양성했다. 신용을 통해서 실직적인 소득 능력과 무관하게 진행된 신용불량자들의 과소비 이면에는 이렇게 정부의 묵인과 장려책이 있었던 것이다.

| [ 칭찬과 아쉬움 ] ‘신용불량이 개인의 책임인가, 사회적 문제인가’를 묻는 예컨대 논술에 많은 학생들이 글을 보내왔다. 그러나 글의 양에 비해 내용의 다양성은 부족한 한주였다. 우선 글의 논조가 획일적이었다. 대부분의 글이 신용불량자를 양산한 사회구조에 비판의 중심을 두면서 개인의 책임까지 덧붙이는 흐름을 택했다. 특히 글의 첫머리는 판에 박은 듯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다 세 자녀와 함께 투신 자살한 주부의 이야기를 끌어낸 것이다. 그 배후에 늘어가는 카드빚과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가 도사리고 있다는 지적도 비슷했다.
비슷비슷한 논조의 글들 중에서 가장 짜임새가 뛰어난 글을 이번주 예컨대 글로 뽑았다. 인천 부평고 성윤오 학생은 뒤르켕의 자살론, 힐데브란트의 신용경제론, 르페브르의 일상성 이론 등을 적절히 섞어가며 신용불량이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의제임을 논증했다. 유명한 저술의 인용이 단순한 지식 과시에 그치지 않고, 글의 맥락에 녹아 들어간 휼륭한 글이었다. 아쉽다면, 서론과 결론이 평범해 보인다는 것이다. 차분한 논리를 유지하면서 함축적 비유까지 덧붙인다면 더욱 좋은 글이 될 것 같다.
항상 수준급의 글쓰기 실력을 보여주는 인천고 최진헌 학생은 이번에도 단정하게 정리된 글을 보내왔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우선 항상 매트릭스 운운하며 글을 시작하는 버릇은 바람직하지 않다. 신용카드의 기원을 담은 마지막 단락도 결론으로서 적절치 않아 보인다. 오히려 이 부분을 본론에 배치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이미 ‘예컨대’로 뽑힌 적이 있는 전해준 학생과 유성민 학생도 그들 글쓰기의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보여주는 글을 보내왔다. 대전 보문고 유성민 학생은 신용불량자를 반공정책에 희생된 실미도 부대원들에 빗대 경제정책에 희생된 내수진작의 전위대로 규정했다. 이 비유가 그의 글을 끌어가는 힘이고, 빛나게 하는 요소다. 그러나 비유로 전체 글을 이끌어가다 보니 정작 신용불량에 대한 논증은 소홀해졌다. 둘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인하대 부속고 전해준 학생도 개인워크아웃제도 등 신용불량자 대책까지 꼼꼼히 짚어가며 깊이 있는 글을 보내왔다. 다만 ‘자본주의 말기 현상’과 같은 논리상 ‘튀는’ 단어가 가끔 보이고 인상적인 비유가 부족하다는 것이 아쉽다.
독산고 김민지 학생은 2500자가 넘는 장문의 글을 보내왔다. 신용불량을 대량 양산한 사회에 대한 생생한 비판이 빛났지만, 지나치게 자신의 경험과 주변의 이야기로만 글이 채워져 논술글에 필요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는 흠이 있었다. 광주 전남고 강건택 학생의 글은 매끄러운 문장과 탄탄한 논리로 구성돼 있다. 특히 ‘자활 의지’가 있는 사람부터 지원해야 한다는 지적은 다른 학생들의 대안보다 구체적이다. 서론과 결론이 지나치게 무난하다는 단점만 극복한다면, 예컨대 글로 뽑혀도 손색이 없을 수준이다.
예컨대에 처음 글을 보내온 학생들이 유난히 많은 한주였다. 지면이 부족해 조언을 듣고 싶어하는 학생들의 글을 일일이 언급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고, 미안하다. 다음에는 ‘뉴페이스’들에게 지면을 좀더 할애할 것을 약속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