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은 매해 말 그해의 주목해봐야 할 ‘올해의 판결’을 선정해 기본권과 인권을 용기 있게 옹호하는 판결을 내린 판사(재판관)들을 응원하고, 그 반대편에 선 판결들을 경고·비판해왔다. 2008년 시작된 ‘올해의 판결’은 올해로 벌써 10회째를 맞았다. 그동안 ‘올해의 판결’이 축적해온 기록은 한국 사법정의의 현재를 가늠하는 흔들림 없는 지표로 자리잡았다.
2017년 ‘올해의 판결’ 후보로 오른 것은 각급 법원의 판결과 헌법재판소 결정을 합친 총 79건이었다. 공익법센터 어필,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대한변호사협회, 민주노총 법률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서울지방변호사회 등 7개 기관(가나다순)과 ‘올해의 판결’ 심사위원단(7명)이 판결을 추천해줬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도 추천 과정에 도움을 줬다.
올해 심사위원단은 노희범 변호사(법무법인 우면·심사위원장), 김태욱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 김한규 변호사(법무법인 공간·전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 박한희 변호사(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안진걸 참여연대 사무처장, 오지원 변호사(법률사무소 나란·전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과장), 이석배 단국대 법학과 교수(위원장 이하 가나다순) 등으로 구성했다.
2017년 ‘최고의 판결’은 예년과 달리 2건을 선정했다. 첫째는 한국 산업재해 소송에 새 이정표를 제시했다고 평가받은 ‘삼성 직업병’에 대한 첫 대법원 판결, 둘째는 한국 헌정 사상 처음 대통령을 파면한 헌법재판소 결정이었다. 두 판결의 의미를 양적으로 저울질하긴 어려워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두 판결을 공동 선정했다.
‘최악의 판결’에는 별 이견 없이, 동료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발언을 한 노동자에게 20억원의 손해배상 책임을 분담하게 한 부산고등법원의 판결이 뽑혔다.
_편집자
12월14일 부산시 부산진구 백병원 앞 카페에서 만난 이희진(33)씨.
18살에 삼성전자 입사, 불행의 씨앗 주인공은 이희진(33)씨. 이씨는 18살에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엘시디(LCD)사업부(현 삼성디스플레이) 천안공장에서 꼬박 4년3개월을 일하고 건강이 나빠져 퇴사했다. 그로부터 1년4개월이 흐른 뒤 희귀 난치성 질환 ‘다발성경화증’ 확진 판정을 받았다. 처음엔 당황했고, 나중엔 황당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이씨의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1·2심 법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퇴사 10년 만인 지난 8월 대법원이 그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이씨의 업무와 다발성경화증의 발병·악화 사이에 인과관계를 긍정할 여지가 있다”며 원심을 깨고 원고 승소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승소 소식을 전한 이종란 노무사가 그에게 말했다. ‘아직 산재라고 결론이 난 건 아니다. 대법원 판결을 무시하진 못하겠지만 시간이 좀더 걸릴 거다.’ 그는 기쁨에 들떠 답했다. “지금까지 10년을 기다렸는데, 언제까지 기다리더라도 상관없어요.”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12월14일 낮 2시, 부산 부산진구 백병원 앞에서 이씨를 만났다. 그에게 지난 10년 동안 있었던 일들과 판결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이씨가 삼성전자에 입사한 것은 15년 전인 2002년 11월18일이었다. 열아홉 번째 생일을 보낸 다음날이었다. 실업계 고등학교 3학년 재학생이던 그에게 삼성은 “크고 좋은 기업”이었다. 입사할 때 “우리 집이 잘사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도 고생을 많이 하셔서 힘이 되어드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LCD사업부 천안공장에서 일한 뒤 근처 회사 기숙사에서 잠을 잤다. 중간에 퇴사하는 동료가 종종 있었지만, 이씨는 그저 열심히 일하겠다고 생각했다. 이씨의 업무는 노트북 또는 피시(PC)용 15~19인치 LCD 패널 화면 검사였다. 1시간에 70~80개 패널 화면을 하루 12시간 동안 들여다보며 색상과 패턴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4년3개월 동안 보통 주야 2교대로 근무했다. 그가 담당한 패널 화면 검사라는 것은, 오른손으로 패널을 눈앞 20cm 정도까지 당겨 수십 초 동안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화면에 이물질, 얼룩, 떨림 등이 없는지 확인했다. 점 하나도 놓치면 안 되는 “엄청 타이트한” 작업이었다. 하루에 서너 번은 거즈에 이소프로필알코올을 묻혀 패널 위에 묻은 먼지를 닦아냈다. 그는 “일회용 마스크를 착용했지만 냄새가 코를 찔렀다”고 당시 일을 회상한다. 불량을 잡아내지 못한 날은 2~3시간 동안 추가로 재검사를 했다. 퇴사 때까지 똑같은 일과가 반복됐다. 일터엔 햇볕이 들지 않았다. 창문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씨의 작업 공간 3~4m 앞에 에이징 공정(패널을 가열해 성능·내구성을 검사함)이 있었다. “패널이 내가 있는 쪽으로 빠져나오며 뜨거운 열기와 좋지 않은 공기도 같이 나왔다.” 같은 작업장 부품조립 공정에선 납땜 작업도 했다. 1·2심 판결 뒤엎은 대법원 이소프로필알코올과 같은 유기용제 노출, 주야 교대 근무, 업무상 스트레스, 햇빛 노출 부족. 이씨가 앓는 다발성경화증을 촉발한다고 알려진 요인들이다. 1심 법원(서울행정법원)은 2014년 9월4일 “(이씨가) 전자파와 이소프로필알코올 등 화학물질에 일부 노출됐을 것으로 보이나, 그 정도가 다발성경화증을 유발하거나 악화할 수준이었다고 볼 만한 자료가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2심 법원(서울고등법원) 역시 단정적 해석을 보태며 이씨의 항소를 기각했다. “이소프로필알코올에 대한 노출 정도는 그다지 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씨는) 발병 원인 물질에 일정 기간 노출되었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개연성만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8월29일 다른 결론을 냈다. 대법원은 근로복지공단이 이씨의 작업환경과 그에게 발생한 병의 인과관계를 확인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근로복지공단은 2010년 8월4일 이씨의 산재 신청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작업환경 조사를 의뢰했다. 대법원은 “역학조사에선 작업 과정에서 이소프로필알코올이나 그 밖의 유해 화학물질에 노출된 수준을 객관적으로 확인·측정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업주의 협조 거부나 행정청의 조사 거부, 지연 등으로 유해 요소 종류와 노출 정도를 특정할 수 없었다면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할 수 있다”고 밝혔다. 현행법을 보면, 산재를 입증할 책임은 원칙적으로 피해자(신청자)에게 있다. 하지만 산재 신청자는 회사가 자료 제공과 조사 협조를 거부하면 작업환경 유해 요소들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 대법원은 이런 사정을 살펴, 사업주가 정보 제공에 모르쇠로 일관하는 행태에 경종을 울렸다. 대법원은 이번 소송에서 고용노동부·삼성의 자료 공개 거부 사례를 지적했다. 대전지방고용노동청 천안지청은 1심 소송에서 판사가 요청한 ‘삼성디스플레이 천안·아산공장 산업안전·보건진단 결과보고서’(2013년 4월·대한산업보건협회)를 약 한 달 만에 제출하면서, 삼성의 영업비밀을 이유로 주요 내용을 삭제했다. 삭제한 내용에는 ‘공정별 취급 유해 화학물질 현황 및 개선 방안’ 등 이씨의 병과 작업의 인과관계를 입증할 만한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이씨를 대리한 조지훈 변호사(법무법인 다산)는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몇몇 단어를 삭제한 정도가 아니라, 일부 페이지와 표 전체를 삭제한 보고서였다. 소송 쟁점에서 의미 있는 내용은 모두 삭제돼 있었다. 나중에 삼성이 요구해 노동청이 삭제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해당 업종 질병들 산재 인정 길 트여 대법원은 그 밖에 “여러 유해 화학물질에 복합적으로 노출되거나 주야 교대근무 등 작업환경 유해 요소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 질병 발생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역학조사 결과의 부실함은 따지지 않고, 개별 유해 요인이 각각 질병에 미치는 영향만을 따진 1·2심과 판단이 갈린 지점이다. 대법원은 이어 “첨단산업은 발전 속도가 매우 빨라 작업장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이 빈번히 바뀌고 화학물질과 작업 방식이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산재 발생 원인을 찾아내기 쉽지 않다. …근로자 보호 안전 대책이나 교육 역시 불충분할 수 있다”고 밝혔다. 조지훈 변호사는 “이번 대법원 판결은 첨단 전자산업의 특수성과 함께 유해 화학물질들의 누적적·복합적 작용 가능성을 지적함으로써 앞으로 해당 업종 질병들의 업무 연관성을 폭넓게 인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고 평가했다. 이씨가 오른쪽 손과 다리에 저리는 느낌을 받은 것은 입사 3년 반 만인 2006년 5월 무렵이었다. “마비가 와서 손이 잘 안 움직이고 뭔가 다리를 잡고 있는 느낌”이었다. 처음엔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매일 같은 자세로 12시간씩 일해서 단순히 근육에 문제가 생긴 줄 알았다. 그런데 물리치료를 받아도 전혀 낫지를 않았다.” 2006년 여름 정기휴가 기간에 고향 부산에 내려가 MRI(자기공명영상)를 찍었다. 목과 허리만 찍었는데 문제가 없었다. 그땐 머리 쪽에 문제가 생긴 걸 몰랐다. 아픈 몸으로 퇴사할 때까지 9개월을 더 일했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다니다 퇴사하자”고 생각했다. 그는 “그때 병가를 냈으면 좀더 빨리 진단받지 않았을까” 후회한다. 우연히 만난 ‘반올림’, 그리고 시작된 싸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 2017년 11월20일 경기도 수원 영통구 삼성디지털시티 앞에서 10주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심사위원 20자평
김태욱 산재보험제도의 존재 이유를 명확히 한 올해 최고의 판결
김한규 상당인과관계는 더욱 폭넓게 인정돼야 한다
노희범 근로자를 위한 진정한 산재법 법관이 제정하다
박한희 산업보험제도는 이래서 필요하다. 업무상 질병 인정 확대하라
안진걸 산재인정은 다행이지만 산재 자체가 안 일어나는 삼성 되어야!
오지원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사업장에서의 안전문제에 경종
이석배 삼성은 책임을 인정하고 글로벌 기업으로서 노동환경 개선에 노력하길
줄줄이 이어지는 '삼성 직업병'
반도체도 첫 뇌종양 산재 인정
삼성에서 직업병이 발생했음을 최초로 인정한 대법원의 판결은 대한민국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됐다. 12월14일 부산에서 만난 판결 당사자(원고) 이희진(33)씨도 “내 판결이 하나의 기준점이 됐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씨는 삼성전자 엘시디(LCD)사업부 천안공장을 다니다 ‘다발성경화증’이라는 희귀 난치성 질환 진단을 받았다. 그는 첫 산재 신청을 낸 뒤 10년 만에 대법원에서 산재 인정 취지의 승소 판결을 거머쥐었다.
그로부터 석 달 뒤, 또 다른 기념비적인 판결이 나왔다.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에게서 발생한 뇌종양을 처음 산재로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나온 것이다. 대법원 3부(주심 박보영 대법관)는 11월14일 삼성전자를 퇴사한 뒤 뇌종양(교모세포종) 판정을 받은 고 이윤정(사망 당시 32살)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불승인 처분 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업무와 발병 사이에 상당인과관계를 긍정할 여지가 크다”고 밝혔다.
이 판결은 앞선 이희진씨의 상고심 판결 취지를 그대로 따랐다. 즉, 첨단산업 현장의 희귀 질환에 대한 연구가 불충분하다고 해서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를 쉽게 부정할 수 없다는 점, 특정 산업군에서 발병률이 높거나 사업주·행정청이 협조·조사를 거부·지연할 때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해야 한다는 점, 개별 유해 요인이 복합적·누적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점 등이었다.
고 이윤정씨는 1997년 5월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2003년 7월까지 약 6년간 온양사업장 반도체 조립라인 검사 공정에서 근무하며 반도체칩 고온 테스트 업무를 맡았다. 테스트가 끝나면 합선 등으로 고무가 타는 듯한 냄새가 났다. 합선으로 생긴 검댕은 에어건(air gun)으로 직접 제거했다. 많게는 하루 12시간 일했다. 퇴직한 지 약 7년 만인 2010년 5월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근로복지공단이 2010년 9월13일 그의 산재 신청을 불승인하자 소송을 냈다. 1심이 진행되던 2012년 5월7일, 그는 뇌종양으로 숨졌다.
대법원은 “이씨가 근무한 사업장에서 벤젠, 포름알데히드, 비전리 방사선, 납 등 발암물질들이 검출됐다. 발암물질이 노출 기준 범위 안에 있더라도 장기간 노출될 경우 건강상 장애를 초래할 수 있고, 여러 (물질·환경적) 유해 요인에 복합적으로 노출될 경우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역학조사 당시 고무가 타는 듯한 냄새와 검댕 등의 원인 물질과 노출 수준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반도체 사업장에서 뇌종양 발병률이 한국인 전체 평균 발병률(국내 여성 10만명당 0.52명 발병) 등과 비교하여 유달리 높다면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는 데 유리한 사정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또 이씨가 퇴직한 뒤 7년이 지나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고 해서 업무와의 관련성이 없다고 단정할 순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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