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_정치의 시간
12월5일 아침 8시부터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인 9일 저녁 8시까지 각 정당, 국회 곳곳, 그리고 본회의장을 5명의 기자가 취재했다. 기자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긴다. 한국 사회 전체가 번뇌한 108시간의 기록이다.
D-4
추미애 대표를 비롯한 더불어민주당 의원, 당직자들이 12월5일 저녁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계단에서 촛불로 ‘탄핵’이란 글자를 만들어 박근혜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 오전 11시, 국회 의원회관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가 들어서자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국민의당 국회의원과 중앙위원 등 300여 명이 의원회관 대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박 원내대표는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옆자리에 앉았다. 누군가 안 전 대표에게 다가가 이름표를 바로잡아줬다. 이날 오전, 박 원내대표는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마지막 회의를 주재했다. 회의장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하던 그는 웃었다. 말없이 있을 때, 그의 낯빛은 어두워졌다. 이윽고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로서 160일 동안 수행하던 비대위원장직을 물러납니다.” 박수가 터져나왔다. “물러난다는데 박수를 치네요.” 참석자들이 ‘와’ 하며 웃었다. 당직자 한 사람이 기자를 조용히 불렀다. 그는 며칠 사이의 상전벽해를 설명했다. ‘탄핵 반대하는 당신이 사람이냐’는 문자가 이젠 ‘탄핵 가결에 총력을 기울이라’는 내용으로 바뀌었다고, 처음엔 질책했지만 지금은 격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후, 국민의당은 국회 본관 출입구 앞에 텐트를 쳤다. ‘탄핵열차 300’이라는 명패가 붙었다. 의원들이 돌아가며 노숙농성을 시작했다. # 오후 2시, 국회 의원회관 제1세미나실 “박원순 시장과 저는 2인3각 경기 중입니다. 박원순 시장이 넘어지면 제가 넘어지고 제가 넘어지면 박원순 시장도 넘어집니다.” 핑크색 재킷을 입은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높았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주최한 ‘국민권력시대, 어떻게 열 것인가?’ 토론회는 민주당 의원 77명이 공동 주최자로 이름을 올렸다. 박 시장은 민주당 의원들보다 앞서 ‘탄핵’을 요구했다. 이날도 의원들보다 한발 앞서갔다. “탄핵으로 국민권력시대의 포문을 열어야 합니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토론회 자료집은 시작 전에 이미 동났다. 토론회장 바깥을 지키던 한 민주당 당직자가 중얼거렸다. “물 들어온 게 확인되네. 서울시장 주최 토론회에 이렇게 기자가 많이 온 걸 보면….” # 오후 2시30분, 국회 의원회관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 사무실은 책과 보고서로 항상 어지러웠다. “지난 주말에 치우느라 한참 걸렸다”며 유 의원은 웃었다. 묵은 책은 정돈했지만, 모든 일이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1~2분 간격으로 휴대전화가 울렸다. “사흘 동안 문자메시지만 4천 개가 왔다”고 그는 말했다. 대다수는 탄핵을 종용하는 내용이었다. 전날인 4일 새누리당 비주류 모임인 비상시국회의는 촛불 민심에 따라 ‘무조건 탄핵’에 합의했다. ‘4월 퇴진-6월 대선’이라는 당론에 배치되는 결정이었다. 유 의원은 ‘무난한 탄핵’을 예상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그 전에 어떤 말씀을 하시느냐가 변수”라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평소에도 말수가 적다. 탄핵 정국에선 모든 언론의 인터뷰를 거절하고 있다. 외부 일정도 취소했다. 국회에 머물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탄핵 찬성표’를 점검하지는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전면에 나서긴 좀 그래.”
D-3 # 6일 오전 7시, 국회 의원회관 제7간담회실 까만 코트를 걸친 권성동 새누리당 의원이 들어섰다. “오늘은 어느 방에서 준비한 거야?” 책상마다 샌드위치와 따듯한 커피가 놓여 있었다. 비박계가 주축이 된 비상시국회의 소속 의원 40여 명은 회의를 열 때마다 돌아가며 아침을 준비했다. 유승민 의원실에서 준비한 이날의 샌드위치를 의원들은 잘 먹지 못했다. 이틀 전 회의에서 ‘조건 없는 탄핵’에 뜻을 모았지만 긴장을 놓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무거운 분위기를 깨려는 듯 권 의원은 휴대전화 이야기를 꺼냈다. 비박계 의원들은 탄핵소추안 표결의 캐스팅보트다. 시민들은 그들에게 전화와 문자를 집중적으로 보내고 있다. “지역에서 어르신들 전화가 많이 와. 왜 (탄핵) 찬성하냐고.” “나도 메시지, 전화 많이 와.” “문자, 이거는 심하다 못해서 아주 일을 못해. (전화번호 유출한 사람을) 손해배상 청구하든지 해야지. 짜증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문자 옥석을 가릴 수 없다니까.” “나는 전화번호를 바꿨어!” “나는 착신 금지!” 비공개 회의 직후, 비상시국회의 대변인 황영철 의원이 기자들 앞에 섰다. “흔들림 없이 탄핵안이 가결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모든 준비가 돼 있습니다.” # 오전 8시, 국회 정문 앞
정의당은 국회 정문 앞에서 ‘풍찬노숙 끝장농성’을 벌였다. 12월7일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왼쪽 세 번째)와 의원, 당직자들이 ‘즉각 탄핵’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D-2 # 7일 오전 7시30분, 국회 의원회관 제7간담회실 새누리당 비주류 모임인 비상시국회의 ‘아지트’로 의원들이 모여들었다. 전날 얼굴을 비추지 않았던 초·재선 의원들도 새로 합류했다. “새벽에 일찍 나오셨네. 이제 다 끝났는데 뭘 새벽에 와.” (강석호 의원) “참여 인원이 많이 늘었네.”(심재철 의원) 비공개로 진행된 회의를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회의장 밖으로 종종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한 보좌관이 눈을 찡긋거렸다. “이제 (친박이나 애매한 입장의 의원들을) 설득할 필요가 없어. (그들이) 줄을 서서 오고 있어. 대세가 기울었다고 보는 거지.” # 오후 2시, 국회 의원회관 엘리베이터 회색 트렌치코트 주머니에 손을 찌른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는 엘리베이터 안이 울릴 정도로 목소리를 높였다. “세월호 7시간을 (탄핵소추안에서) 안 빼면 (본회의장에) 안 들어갈 거다!” 기자를 따로 만난 그는 성큼성큼 사무실로 들어가 코트를 벗으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대통령 탄핵 때문에) 얼마나 괴로운지 아나. 그런데 왜 우리가 비굴해야 하나. 7시간 포함된 탄핵안에 찬성하면 그걸 인정하는 건데…. 다시 협상하라고 지시했어.” ‘세월호 7시간’을 놓고 새누리당 비주류가 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 오후 2시30분, 국회 본청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실 우상호 민주당 원내대표는 사흘째 검은 터틀넥을 입고 있다. 목소리는 자주 갈라졌다. 며칠째 원내대표실에서 자는 그는 자꾸 물을 마셨다. “탄핵 가결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세월호 7시간도 유연하게 논의할 수 있지만…” 말끝을 흐렸다. “(비박계로부터 세월호 7시간 대목을 탄핵소추안에서 빼달라는) 전화를 받긴 했습니다. 가결 200명 선을 넘긴다면 왜 고민하겠어요.” 곁에 있던 기동민 민주당 원내대변인이 말했다. “탄핵까지 이제 채 50시간도 남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 오후 3시, 국회 본청 앞 계단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 야 3당은 탄핵 과정에서 긴밀하게 공조했다. 12월 7일 야 3당 의원과 당직자들이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위한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D-1 # 8일 오전 10시, 국회 본청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장 더불어민주당 의원총회는 금방 끝났다. “국회의원직을 버리고 탄핵안을 가결시켜야 한다”는 우상호 원내대표의 제안에 모두 동의했다. 의원 전원이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작성해 지도부에 제출하기로 했다. ‘세월호 7시간’과 관련해서도 “더 이상은 협상도 수정 용의도 없다”고 못 박았다. 의원들은 자필 서명한 사직서를 페이스북 등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 오전 10시30분, 국회 본청 국회의장 집무실 여야 3당 원내대표 회동에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굳은 표정으로 가장 먼저 들어섰다. 손에 둘둘 말고 있던 A4용지를 쫙쫙 펴서 정세균 국회의장에게 들이밀었다. “조국 교수가 올린 이거 보세요.” 조국 서울대 교수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퇴진행동’의 국회 압박 계획 포스터였다. “이런 식으로 의회민주주의를 광장민주주의로 대체해도 됩니까? 의장님께서 국회 질서 유지를 의무할 책무를 지켜주십시오!” 격앙된 정 원내대표는 야당 의원들의 본회의장 앞 로텐더홀 농성 철회, 국회 본관 앞 텐트 철거 등을 주장했다. 발언 중간에 들어온 우상호 민주당 원내대표는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싫은 내색을 했다. “저는 아직 안 왔습니다. 내가 와야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모두 모이지 않았는데 먼저 발언을 시작한 정 원내대표에 대한 항의였다. 세 원내대표는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기자들을 내보내고 진행된 비공개 회동의 결과를 김영수 국회 대변인이 발표했다. 12월9일 국회 안 집회는 불허됐다. 다만 국회 경계 100m 이내에서의 집회는 허용됐다. # 오전 11시, 국회 본청 옥상 국회 사무처 직원들이 옥상 하늘정원에 삼삼오오 모였다. 한 고참 직원이 말했다. “부결이 되면 큰일이죠.” 탄핵소추안이 부결되면 서울 광화문광장의 분노한 촛불이 국회로 몰려올 것이라고 했다. “부결되면 국회가 끝장납니다. 의원들은 아무도 국회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것 같아요.” # 오후 12시30분, 국회 본청 7층 복도 복도 구석 의자에 청소노동자 6명이 귤과 인스턴트커피를 두고 빙 둘러앉았다. 구내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빨리 마치고 모처럼 허리를 펴는 순간이었다. 이들은 아직 용역업체가 지급한 자주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지난 12월5일 국회가 이들을 직접 고용하기로 했지만, 정규직이 되려면 한 달 정도 남았다. “아휴, 말도 마. (이번주에) 본청 쓰레기가 너무 많이 나와. 청문회도 있으니까 보좌관들, 기자들 다 여기로 몰려와서 그래. 일이 두 배야.” 가장 힘든 청소는 본청 흡연실이라고 한 노동자가 말했다. 담배도 늘고 가래침도 늘어서 아주 더럽다고, 배운 사람들도 똑같다고 푸념했다. 얼굴을 찌푸린 본청 근무자들 사이에 앉은 의원회관 담당 노동자는 빙그레 웃었다. “회관엔 사람이 없어서 별로 안 바쁜데….” # 오후 1시30분, 국회 본청 246호
새누리당은 탄핵을 앞두고 찬성하는 비박계와 반대하는 친박계로 갈려 내홍을 겪었다. 12월8일 이정현 대표(왼쪽)와 정진석 원내대표가 의원총회를 앞두고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
탄핵소추안 표결을 하루 앞둔 12월8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 앞 로텐더홀에서 의원총회를 열고, 조를 나눠 철야농성을 결의했다.
D-Day
12월9일 한 시민이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에 떨어진 장미꽃을 줍고 있다. 이날 참여연대와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에 동참해달라며 의원들에게 장미꽃을 나눠줬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12월9일 국회 본청 계단 앞에서 시민단체 회원이 건네는 장미꽃을 뿌리치고 있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2월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투표를 마치고 국회 본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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