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_진실한 친구 최순실
박근혜 대통령의 오랜 ‘말벗’ 최순실은 대통령 연설문을 미리 받아보고, 뜯어고쳤다. 30cm 두께의 ‘대통령 보고자료’는 거의 매일 밤 최순실의 서울 논현동 사무실 책상 위에 놓였다. ‘최순실 재단’으로 불리는 미르재단과 K스포츠 재단은 대기업에서 순식간에 수백억원을 모금했다.
최순실씨가 박근혜 대통령의 실제 연설에 앞서 연설문을 받아본 것으로 의심되는 2014년 3월 독일 드레스덴 연설. 이 연설문은 대북관계 로드맵을 제시하는 것이어서 극도의 보안 속에 작성됐다. 그런데 최씨는 연설 하루 전에 파일을 받았고, 파일엔 붉은 글씨로 수정 부분까지 표시돼 있었다. YNA
10년 넘게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을 맡아오다 지난 7월 갑작스레 사표를 낸 조 전 비서관은 올해 초 “대통령 연설문을 작성해 올리면 이상해져서 돌아온다”며 지인에게 괴로움을 토로했다. 실제 드레스덴 연설문만 봐도, 한 문장 안에 ‘기적’이라는 말이 두 차례 반복되면서 문장이 이상하게 꼬여버렸다. ‘기적’이란 말은 드레스덴 연설에서만 ‘라인강의 기적’(3차례), ‘한강의 기적’(2차례)을 포함해 모두 6차례 반복된다. <한겨레21>은 지난 1~2월 ‘숫자로 읽는 대통령’이라는 기획연재 기사를 통해 ‘대통령의 말’을 데이터 분석한 바 있다( 제1096호, 제1097호, 제1100호 표지이야기 참조). 1998~2015년 대통령기록관에 보관된 전·현직 대통령 연설문 총 2597건을 수집해 분석했는데, 이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 179건(대통령 취임 이후부터 2015년 10월30일까지)도 있었다. 대통령 연설문 사전 유출 논란이 벌어진 뒤, 당시 분석 결과를 다시 살펴봤다. 우선 드레스덴 연설에서 거듭 강조된 ‘기적’이란 단어는 어땠을까? 박근혜 대통령 연설문에서 ‘한강의 기적’이란 표현은 48차례, 이와 별개로 ‘기적’은 36차례 등장한다. “지금 우리 경제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 경제가 다시 한번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느냐, 아니면 저성장이 고착화되느냐가 결정될 것입니다.”(2014년 8월15일 ‘제69주년 광복절 경축사’) “우리 민족이 다시 하나가 되면 (중략) ‘한강의 기적’을 넘어, ‘한반도의 기적’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2015년 8월15일 ‘제70주년 광복절 경축사’) 취임사부터 ‘독일’에 남다른 애정 <한겨레21>은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에서 많이 쓰인 단어나 특정 문구를 1~500위까지 꼽아봤는데, 그중 ‘한강의 기적’이 500위 안에 포함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유일했다. ‘새마을운동’(46차례), ‘애국심’(43차례) 같은 단어의 사용도 다른 대통령들과 달리 빈번했다. 연설문에 공식적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는 호칭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지만, 드레스덴 연설에서 ‘그 당시 독일을 방문하셨던 한국의 대통령’이라고 지칭했듯이 ‘월남’ ‘한강의 기적’ ‘새마을운동’ 같은 단어를 씀으로써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계승자임을 드러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 올해 초 대통령 연설문을 분석하면서 눈여겨본 대목이 하나 더 있다. 컴퓨터 자판에서 ‘Ctrl+V’로 붙여쓰기 한 듯이 비슷한 문구가 서로 다른 연설문에 등장했다. 특히 독일을 반복해서 예로 든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우리의 역사는 독일의 광산에서, 열사의 중동 사막에서,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 공장과 연구실에서, 가족과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우리 국민들이 계셔서 가능했습니다.”(2013년 2월25일 ‘대통령 취임사’) “국민들의 의지와 투혼으로 일어나 독일의 광산에서, 열사의 중동 사막에서, 월남의 정글에서 숱한 역경을 헤치며 국민의 피와 땀으로 기적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2013년 8월15일 ‘제68주년 광복절 경축사’)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독일에 건너와 광부와 간호사로 조국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한 것”(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연설)은 사실이지만, 보통 해외에 나가 돈을 벌어들인 한국의 산업 역군을 이야기할 때 자주 쓰는 관용구는 독일이 아니라 중동이다. 50년 전 방독한 아버지 뒤를 따라 2014년 독일을 방문하기 1년여 전부터 박근혜 대통령은 연설문에서 독일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셈이다. 우연일지 몰라도, 최순실씨와 독일의 인연도 남다르다. 최씨는 1970년대와 1980년대 유학, 정착을 위해 독일에 상당 기간 체류했고, 딸 정유라씨가 승마를 시작한 뒤 자주 독일을 오갔다. 최근 딸과 함께 머무는 곳도 독일이다. 또 박근혜 대통령은 연설문에선 잘 쓰지 않는 ‘독특한’ 단어들을 갑작스레 등장시키곤 했다. ‘대박’이 대표적이다. “저는 한마디로 ‘통일은 대박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2014년 1월6일 ‘신년 기자회견’),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쉽고 빠르게 창업으로 이어지고 창업이 대박으로 이어지는 성공 사례”(2014년 2월25일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담화문). 세월호 참사를 이야기하면서 불쑥 등장한 ‘적폐’도 그렇다. “올해 들어 잇따라 발생한 사건·사고들은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쌓여온 비정상적인 관행과 적폐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습니다.”(2014년 8월15일 ‘제69주년 경축사’) ‘적폐’는 <한겨레21>이 분석한 연설문에서 20차례나 등장했다. 공식 연설문은 아니지만 회의 때 발언도 비슷하다. “쓸데없는 규제는 우리 몸을 자꾸 죽여가는 암덩어리”(2014년 3월10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일자리 창출과 투자를 가로막고 있는 규제들은 한꺼번에 단두대에 올려 처리하게 될 것”(2014년 11월25일 국무회의), “정말 간절하게 원하면 전 우주가 나서서 다 같이 도와준다”(2015년 5월5일 어린이날 행사),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2015년 11월10일 국무회의), “(선거에서) 국민을 위해서 진실한 사람들만이 선택받을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2015년 11월10일 국무회의). 진실은 ‘진실한 사람들만이’ 알리니 지금까지 박근혜 대통령이 구사한 이 단어들은 대체 누구의 말이었던 걸까? ‘정말 간절하게’ 온 국민이 궁금해하고 있지만, 그 진실은 박 대통령 주변의 ‘진실한 사람들’만이 알 것이다. 진실의 순간이 오면, 어쩌면 ‘한강의 기적’ 대신 온 국민의 ‘혼이 비정상’이 되는 일이 진짜로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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