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당 차원에서 매달 한 번 이상 이슈토론회를 열었다. (부산 관련 정책을 연구하는) 오륙도연구소를 중심으로 부산의 진보·개혁적 교수들을 끌어들였고, 부산 사람이 관심 있는 이슈도 계속 던졌다. 원전 폐쇄 운동과 같은 의제도 예전에는 (우리 당이) 립서비스만 하고 동참을 잘 안 했는데 1인시위를 하는 등 열심히 참여했다.
부산 문제를 이슈화하고 부산 언론에 계속 보도되니까 ‘빨갱이 아니면 전라도당’이라고 생각했던 부산 사람들도 ‘야당이 변했다, 노력한다’고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게 이번 선거의 중요한 백그라운드(배경)가 됐다.
야성은 아니더라도 ‘인디펜던트 보트’(Independent vote)까지는 됐다. 후보와 상황에 따라 지지 정당을 바꾸는 ‘독립적 투표층’이 생겨났다. 독립적 투표는 선진도시·선진사회의 공통점이다. 정당에 구속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자유로운 투표자다. 부동층은 뭔가 소신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말인데 독립적 투표층은 소신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물에 잡힌 물고기에겐 먹이를 주지 않는다. 방법은 (새누리당이 쳐놓은) 그물을 찢어야 한다”고 (부산 시민들에게) 말했다. 이번에 소신 투표를 한 사람들은 그 그물을 찢고 나온 사람들이다. 그들이 이번 선거 혁명의 주인이 됐다.
권리 혁명이란 의미다. 영국의 시민혁명(1688년)이 참정권을 확보해 시민들의 권리를 왕권으로부터 찾아냈다면, 부산 시민들은 일당 독점 체제의 새누리당 권력에 대해 ‘인마, 그 권력 우리 거야. 원래 우리 거였다고’라며 주권 혁명을 일으켰다고 본다.
이번에 지역 주민들에게 ‘지역주의 극복’ 같은 말을 한마디도 안 했다. 그분들 머릿속엔 지역주의란 말이 없는데 자꾸 지역주의를 얘기하면 얼마나 기분이 나쁜가. ‘새누리당은 우리 편’이라는 의식이 있긴 한데, 그건 다분히 상황이 만든 강요된 의식이다. 새누리당 당원이 몇만 명 있는 곳에서 새누리당이 싫다고 하면 지역 기득권층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니까. 그러다가 이번에 새누리당을 향해 ‘이놈들 봐라, 혼을 내자고’라며 확 일어난 것이다.
(3당 합당 이전 1970~80년대) 부산은 수출입의 최일선 현장이었다. 당시 부산의 수출 비중이 전국의 25%였다.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의 아들딸들이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젊은 노동자가 와서 일하니 야도(야당의 도시)일 수밖에 없었다. 부산 시민들이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화운동에도 적극 가담했다.
이제 부산의 수출 비중은 전국의 3% 정도다. 7개 대도시 중 노인인구 비율이 가장 높다. 사회·경제적 환경 요인 자체가 변해서 부산이 여도(여권 성향 도시)가 될 수밖에 없는 것도 있다. 그리고 1990년 3당 합당은 부산이 야도에서 여도가 되는 데 정치적으로 촉발 요인이 됐다.
김 당선자(가운데 사진 맨 왼쪽)가 전국정당화를 꿈꾸며 창당한 열린우리당 서울시당 대회(2005년)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1987년 YS의 비서로 인연을 맺었다. 3당 합당 과정에선 어떤 위치에 있었나.
민정당 당사 점거농성 배후로 구속됐다가 석방(1985년 3월)된 뒤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그러다 대통령직선제 개헌 투쟁을 돕기 위해 YS의 비서로 합류했다. 1987년 12월 직선제로 치른 대선이 끝난 뒤 사표를 냈다. YS가 1988년 총선에 서울에서 출마하라고 했지만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대학 제적이 풀려 복교해 대학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에서 ‘소련 페레스트로이카’(개혁정책)를 주제로 석사 공부를 했다.
YS의 셋째아들이란 말을 들을 만큼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대학원에 다니는데도 YS가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상도동(YS가 살던 동네)으로 불러 (정국 현안에 대한) 의견을 묻곤 했다. 그런데 3당 합당은 나랑 상의하지 않았다. 나도 신문을 보고 알았다. 충격이 컸고,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 YS를 찾아갔다.
YS가 왜 그렇게까지 했다고 생각했나.
1987년 대선에서 DJ가 ‘4자 필승론’(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모두 출마하면 김대중이 이긴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탈당해 출마했다. YS는 분노가 컸다. YS는 ‘저 사람(DJ)과 내가 같이 가는 순간 영원히 집권을 못한다. 나도 양보할 생각이 없고, DJ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 우리끼리 자해적 분열을 하면 민정당 좋은 일만 시키는 거다’라고 생각한 거다.
그래서 YS를 만났을 때 (3당 합당을 통해 대권을 노리는 것에 대해) ‘심정적으로 이해하지만 나는 합당한 당에 따라갈 수 없다. 못 뵙더라도 이해하라’고 말하고 나왔다. 그리고 1년 이상 보지 않았다.
부산 출마 이유 중 하나가 YS의 3당 합당의 과오에 대한 결자해지를 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결국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문민정부 청와대에서 자신이 일한 것 등에 대한 부채감 같은 것인가.
YS에게도 명암이 있다. 과오는 3당 합당으로 인한 영남의 보수화, 이곳에서 새누리당 일색이 되면서 지역주의 구도가 강화된 점이다. YS의 총애를 받은 사람으로서 과오에 대해 내가 책임지고 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독수리 5형제’의 일원으로 한나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을 만드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도 결자해지의 심정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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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의 총애를 받은 사람으로서 과오에 대해 내가 책임지고 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독수리 5형제’의 일원으로 한나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을 만드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도 결자해지의 심정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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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당선으로 결자해지를 좀 했다고 보나.
그런 마음이 좀 있다.
더민주가 부산·경남에서 지속적 확장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새누리당 지지자들은 자신이 야당을 찍어 당선시키기 전까지 지지하는 자체에 겁을 내고 두려워한다. 지지하고 싶어도 그런 마음을 잘 말하지 못한다. 야당 지지가 노출될까 겁내고, 찍어도 안 될 것이라는 패배의식이 있고, 그래서 습관적으로 새누리당을 찍어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야당을 찍으니까 되네, 야당이 되니까 좋네’라는 효능감을 주게 됐다.
부산 시민들도 거부감 없이 우리 당에 다가오는 것은 됐으니 부산에서 당 조직도 확장해야 한다. 2015년 1월 부산에서 더민주 당원이 2천 명뿐이었다. 5배 확대 운동을 해서 이제 겨우 당원 1만 명이 됐다. (우리 당 강세인) 호남 지역의 한 선거구 당원 수준이다. 또 지역의 각계 직능단체들과 적극 접촉해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도와줘서 우군화해야 한다.
부산 시민들이 이번에 우리 당을 적극 지지한 건 아니다. 언제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 민생정치를 제대로 해서 그 사람들이 우리 당을 자기 편이라고 느낄 때 그들의 일부가 (진정한) 지지자가 될 것이다.
국민의 말을 대변하는 정치
김영춘 당선자가 제20대 총선에서 승리가 확정된 뒤 아들(왼쪽), 아내와 함께 축하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당의 비상대책위원이다. 이 당의 문제점은 뭔가.
꾸준하고 일관되게 실천하는 게 별로 없는 것으로 국민에게 비친다. ‘저 당은 뭔가 일관된 목표와 가치를 향해 쭉 나아가고 있구나, 깨지더라도 그 길로 가고 있구나’라는 걸 보여줘야 국민의 마음을 열 수 있다.
더민주가 호남에선 거의 전멸했다. 호남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나는 더민주가 국민 다수의 아픔을 대변하는 정치를 하면 호남 사람들도 지지한다고 본다. 그렇게 해서 우리 당과 어떤 후보가 국민적 지지를 넓히고, 그 후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호남도 지지할 것이다. 호남 특위를 만드는 식의 접근이 왜 필요한가. 호남 입장에선 ‘우리가 무슨 이익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집단인가’라고 생각할 거 아닌가.
학생운동을 했던 당사자로서 운동권 출신 정치인에 대한 비판을 어떻게 생각하나.
운동권이든, 친노이든, 아니든 다 살아가는 모양과 그릇이 있다. 어떤 딱지를 붙이지 말고 그 사람을 보고 평가했으면 좋겠다.
나는 8년(야인 생활)의 공백이 감사하다. 재선 의원 마지막 1년간 운전기사 없이 지냈는데, 뒷좌석에 있을 때와 다른 세상이 보였다. 국회를 떠나고 버스·자전거·지하철을 타고 걸어다니니 또 다른 세상이 보였다. 지식인들, 먹물들이 얘기하는 추상적 민주주의, 이념 문제는 중요한 게 아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진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대변하는 정치를 하면 꿈꾸는 세상이 조금씩 다가올 것이다.
영남 선전의 당사자로서 전당대회에 출마해 어떤 역할을 할 생각이 있나.
별로 없다. 나에겐 부산에서 야권의 힘을 구조화하고 확장시키는 작업이 중요하다. 부산이 잘되면, 경남도 잘되고, 대구·경북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총선 이후 부산·경남 지역에서 더민주가 정당지지율 1등이란 조사 결과도 나왔다. 내년 대선까지 이걸 끌고 가면 얼마나 좋겠나.
8년 만에 돌아온 의회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나.
선거 기간 중에 ‘3대 양극화’(부자·빈자의 양극화, 대기업·중소기업의 양극화, 서울·지방의 양극화)를 막는 기본법을 만들겠다고 했다. 양극화가 더 진행되면 이 나라가 지속 불가능하고 망하는 사회로 간다. 특히 지방은 쪼그라들고 있다. 철학적 전환이 필요하다. 큰 틀에선 국가전략 작업, 작은 틀에선 국가 균형발전을 위해 지방을 살리는 작업에 주력하며 당분간 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한나라당 시절 소장파 쇄신 모임이던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미래연대)에 속한 사람들이 이번 선거를 거쳐 여야에 두루 포진했다(더민주 김부겸·김영춘, 국민의당 김성식, 새누리당 남경필(경기지사)·원희룡(제주지사) 등).
그들과 자꾸 만나려고 한다. 다른 당에 있지만 정치 수준을 한 단계 점프시키는 합의의 정치를 가능케 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3대 양극화 막는 기본법 만들고 싶어”
서울과 부산에서 모두 당선된 최초의 3선이 됐다. 어떤 소명을 느끼나.
뭔가 되려고 산다는 것처럼 불쌍한 인생은 없다고 생각한다. 정치인으로서 이 순간에 사회를 위해 가장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이 뭔가, 그걸 생각하면 된다. 지금 생각하는 정의는 이것인데, 그걸 포기하면서 힘을 키우고 계파와 계보를 만들며 줄을 서고 그렇게 해서 대통령이 되면 뭐하겠나. 이게 내 정치관이다. 대범하게 뚜벅뚜벅 가면 지지도도 따라올 것이다. 안 따라오면 할 수 없다. 나의 가치관을 바꾸면서까지 더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탈바꿈할 생각은 없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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