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2일 아침 출근길, 시민들이 서울 지하철 1호선 신도림역에서 탑승을 기다리고 있다. 신도림역은 출근시간대(아침 6~9시)에 사람들이 많이 승차하는 역 가운데 한 곳이다. 류우종 기자
새벽 6시10분 휴대전화 알람으로 설정한 노랫가락이 귓전을 파고든다. 직장생활 3년차인 김민주(31·가명)씨가 억지로 눈꺼풀을 올렸다. “아아, 가기 싫다.” 몇 차례 몸을 꿈틀거려보지만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순 없다. 화장실에 다녀와 로션을 바른다. 잠시도 지체할 시간은 없다. 입고 갈 원피스와 코트는 간밤에 미리 챙겨뒀다. 새벽 6시30분, 함께 사는 가족들이 깰까 싶어 조용조용 현관문을 열었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위치한 아파트 단지, 짙게 깔린 어둠을 헤치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들이 하나둘 보인다. 김씨는 검은색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5분 동안 종종걸음을 했다. 16번 마을버스를 타야 한다. 멍하니 5분을 흘려보낸 뒤 마을버스를 탔다. 10여 명을 싣고 달리는 마을버스 안에는 라디오 뉴스만이 쩌렁쩌렁 울린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이라크 내의 이슬람국가(IS) 공습을 명령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사막 전쟁은 멀고도 먼데, 내 앞 출근 전쟁은 누가 막아주려나. 낯선 이들이 함께하는 ‘수면버스’
“최근 서울시 주택 가격의 과도한 상승과 수도권의 지역별 주택 가격 격차가 장거리 통근을 유발하고 있다.” -한국교통연구원
아침 7시57분 서울 종로2가 사거리 정류장에 도착했다. 출근시간은 8시까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종로 거리를 내달렸다. 8시하고도 1분. 회사 건물로 들어섰다. 지각이다. 1시간30분 전에 출발했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인사팀에서 ‘늦었다’는 경고 전자우편을 보내올 것이다. 출근길 1분, 1분이 스트레스다. 업무가 시작되는 시간은 오전 9시부터다. 그런데 회사는 업무 시간 전 1시간을 ‘자율학습 시간’으로 정했다. 고등학교에서도 반강제 ‘야자’를 자율학습이라고 한다. 오늘 자율학습 시간엔 근처 식당에서 늦은 아침을 해결했다. 통근시간 1시간 이상, 261만 명 김씨는 회사를 향해 멀리서 오는 수도권 장거리 통근자 261만 명 가운데 한 명이다. 한국교통연구원이 2012년 내놓은 ‘국민 통근통행 부담격차 완화 정책방안’ 보고서는 서울·인천·경기도 거주 통근자 가운데 통근시간이 1시간 이상인 사람은 261만 명(2010년 기준)이라고 했다. 2000년에 견줘 무려 78만여 명이나 늘었다. 경기도가 45만 명으로 가장 많다. 경기도에 대규모 주거지가 개발되면서 인구가 늘었지만, 직장은 여전히 서울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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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2일 새벽 6시30분께, 경기도 파주운정보건지소 근처 버스정류장에 서울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있다. 아침 7시를 넘겨 정류장에 오면 30분을 기다려야 버스를 탈 수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정용일 기자
‘현재 직장에 입사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했던 요인’에 대해 한국 직장인은 ‘출퇴근이 편리한 근무 위치’를 3위로 꼽았다. ‘고용안정성’과 ‘경쟁력 있는 급여’ 다음이었다. -타워스왓슨 2012년 설문조사
경기도 파주시에서 서울 종로구 계동까지 출퇴근했던 장아무개(37)씨는 최근 직장을 옮겼다. “집에서 나와 회사에 도착하면 딱 2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6개월 정도 지내니 버스에서 잠만 자고 몸이 축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해도 늦은 밥 먹고 자기 바빴다.” 1년9개월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그는 집에서 자동차로 15분 걸리는 곳에 새 일자리를 구했다. 장씨는 이제 아침 식사도 하고, 퇴근해서는 아이들과 놀고 대화도 한다. “난 운이 좋은 경우다. 30대 중·후반 직장인이 이직하고 싶어 해도 마땅한 곳을 찾기 어렵다.” 일부 대기업 자율출퇴근제, 누가 하나 장씨는 찾기 힘든 경우다. 직장인이 장거리 통근을 벗어나는 방법은 많지 않다. 회사가 주로 몰려 있는 서울 강남권과 종로, 여의도 등의 주변 집값은 비싸다. 매해 치솟는 전세 보증금과 아이들 교육 문제도 발목을 잡는다. 직원이 집을 옮기기 힘들다면 대책을 내놓아야 할 곳은 기업이다. 하지만 기업은 무관심하다. 직원이 아침 교통 정체를 피하기 위해 출근 시간을 뒤로 옮기면 그는 회사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한국의 기업문화는 일찍 출근한다고 해서 일찍 퇴근하기도 어렵다. 장거리 통근자는 단거리 통근자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회사와 집 밖에서 보낸다. 해결책으로 삼성 등 일부 대기업에서는 자율출퇴근제를 도입하고 있지만 현장의 반응은 차갑다. 삼성전자 연구원의 한 가족은 “자율출퇴근제가 있다는 것은 들었으나 일부 부서에서만 한다”고 말했다. “남편은 아침 8시에 출근해서 밤 11시에 퇴근하고 있다. 최근에는 3주에 한 번씩 무조건 주 7일 근무를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자율출퇴근제는 겉으로만 좋아 보이는 정책이다.” 대부분의 기업 최고경영자들은 직원들이 장거리 출퇴근으로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들은 직원들이 아침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줘야 하고, 러시아워로 ‘파김치’가 돼서 회사에 출근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다국적 인사컨설팅업체인 타워스왓슨코리아의 김기령 대표는 “경영자들이 생각을 바꿔 유연근무제를 제대로 시행하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국은 출근 시간이 아침 7~9시에 몰려 있는 게 문제다. 회사도 직원들이 잘 쉬었다가 아침에 생생하게 출근하는 게 가장 좋다. 그러려면 시간 유연근무제를 도입해 출퇴근 시간대를 다양화하는 게 유일한 대안이다.” 김 대표는 “물론 상사가 직원에게 생각지도 않은 일을 부가시켜 야근하게 하면 유연근무제는 도입되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출퇴근 문제는 기업의 성과와도 관련이 있다. 타워스왓슨이 전세계 직장인 3만2천 명(한국 1천 명)을 대상으로 2012년에 한 설문조사를 보면, ‘현재 직장에 입사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했던 요인’에 대해 한국 직장인은 ‘출퇴근이 편리한 근무 위치’를 3위로 꼽았다. ‘고용안정성’과 ‘경쟁력 있는 급여’ 다음이었다. 인재를 잡으려면 출퇴근 시간이 고려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30분만 일찍 퇴근해도 저녁 6시 김민주씨는 다행히 칼퇴근을 했다. 집에 좀더 빨리 갈 수 있는 명동 국민은행 앞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대신, 다시 종로2가 사거리 정류장에 섰다. 출근길보다 더 힘든 퇴근길의 시작이다. 승객을 가득 채운 버스는 명동 국민은행 앞 정류장을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종로2가를 출발한 버스는 북창동, 남대문시장, 명동 등 강북 도심을 한 바퀴 돈 뒤 시외로 빠져나간다. 이렇게 도로에서 ‘멍하니’ 2시간을 보낸다. 김씨는 “30분만 일찍 퇴근하면 버스에 앉아 일부러 서울 도심을 30~40분 돌 필요가 없다. 이왕 새벽에 출근하고 있으니, 유연근무제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