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에 세로 선 채제1494호 언젠가 내 이동경로가 담긴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참 많이도 이사를 다녔다. 성인이 되어 가족을 꾸린 뒤에만 열 번을 이사했고, 그전에 부모님과 살 때도 십수 번을 이사했다는 기록이 표에 담겨 있었다. 그중 한두 번은 자발적인 이사였다. 나머지는 모두 주머니 사정과 집주인의 처분에 따른,...
잡고는 싶고 죽이기는 싫고제1492호 어디에나 있다. 마치 개미처럼. 눈에 보이는 곳에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더욱 많다. 도시인과 쥐는 공존관계지만 둘이 눈맞춤하는 경우는 현실보다는 영화나 우화에서일 때가 많을지 모른다. 쥐의 눈을 보았는가. 검은콩처럼 작고 새카만, 그러면서도 보석처럼 반짝이는, 호기심 가득한 쥐의 눈망울을 마주...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틀림제1490호 좋은 퀴즈는 대개 재미난 함정을 품고 있다. 상식과 지식을 오묘하게 버무려 ‘아, 뭐더라’ 하는 궁금증을 일깨우고, 맞히건 틀리건 작은 탄성을 자아낸다. 너무 어려워도 쉬워도 함정은 사라진다. 1973년에 시작해 지금까지, 무려 50년 넘도록 살아남은 프로그램 <장학퀴즈>...
타이거 모기 타이어 모기제1488호 거듭된 수청 요구를 거절하자 변사또는 춘향을 형틀에 묶어 고문한다. 몽둥이로 정강이를 때리는 ‘형문’은 회복 불능의 신체 손상은 물론 그 자리에서 목숨을 앗을 수도 있었기에 한 번에 서른 대 이상 칠 수 없도록 법으로 정해 있었다. 춘향은 서른 대를 맞고서야 목에 칼을 쓴 채 감옥에 갇힌다. 무려 3년....
높은 곳에 매달린 님제1486호 하마터면 칠 뻔했다. 시커먼 덩어리가 4차선 도로를 쪼르르 넘더니 겁도 없이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속도를 늦추자 달아나기는커녕 쫓아왔다. 비상등을 켜고 갓길에 차를 세우니 꽁지를 흔들며 품에 안기는 게 아닌가.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검은 강아지였다. 하, 요런 맹랑한 녀석. 그대로 뒀다간 곧바로 죽을 목숨처럼...
숨은 냥이 쫓기…고양이는 어디에 있을까제1484호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생각하기에 좋은 동물’이 있다. 18세기 프랑스 문화사를 연구한 로버트 단턴은 여기에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렇다면 욕하기 좋은 동물도 있다.” ‘개새끼’는 전혀 욕이 아닌 단어의 조합이지만, 입에서 나와 사람을 향하는 순간 욕이 되는 대표 사례다. 우리가 잘 알지도 ...
네가 죽어 누워 있을 때제1482호 언젠가 이렇게 썼다. “어떤 사진이 아름답다고 해서, 그것을 찍는 과정마저 아름다웠을 거라 여기는 건 아프다.”우리는 또렷하고 선명한 시선으로 사진을 바라보지만, 안타깝게도 사진을 통해서 ‘사진의 전후’를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사진으로 뭔가 보여준다는 건, 뭔가 가리고 보여준다는 말과 같으니까. 사진은…
원숭이, 네 지문은 까망제1480호 싸우기도 이젠 지쳤다.살다보니 다양한 이유로 인감증명서를 떼야 할 일이 생긴다. 그때마다 주민센터 앞에서 머뭇거린다. 자동발급기를 쓰면 좋으련만, 날 알아주지 않는다. 내 지문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창구 직원은 대개 “네 ?” 반문부터 하고는, 천연기념물을 보듯 동그랗게 눈을 뜨고 위아래를 훑는...
루디, 부디…인간과 1.2% 유전적 차이, 어느 침팬지의 죽음제1478호 달아났지만, 달아날 곳이 없었다. 달아난 곳이 아프리카 열대우림이 아니라, 대구 달성공원 산책로였다.2023년 8월11일 오전 9시11분, 사육사가 우리를 청소하는 도중 열린 문틈으로 침팬지 두 마리가 달아났다. 스물다섯 살 수컷 루디와 서른여섯 살 암컷 알렉스였다. 알렉스는 20분 만에 사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