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새>. 국외자들 제공
여성 감독 김보라의 놀라운 데뷔작인 <벌새>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돼 넷팩상을 받은 이후 지난 1년간 베를린 국제영화제, 뉴욕 트라이베카영화제 등 세계 25개 영화제의 상들을 그 작은 부리로 집어올린 무시무시한 영화다. 1994년 대한민국 서울 대치동에 살았던 방앗간 집 딸 은희의 아파트 문을 여는 순간, 각기 다른 시대, 다른 공간, 다른 환경에서 자신의 유년을 견뎌낸 관객은 모두 열네 살의 토끼굴로 떨어지는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무너진 성수대교처럼 끊어졌던 성장의 기억은, 날을 세운 유리 조각처럼 여전히 반짝거리며 그곳에 서 있고, 25년 전 과거는 추억하고 회고하는 노스탤지어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고통과 기쁨으로 다가온다. 영화 <벌새>에서 인상적인 연기로 말레이시아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김새벽은 어떤 관객에게는 아직 모르는 얼굴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관객에게 김새벽은 이미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은 배우다. 2012년 조선족 소녀 순희로 나온 <줄탁동시>를 시작으로 <한여름의 판타지아> <초행> 등으로 이어지며 독립영화계에서 비옥한 땅을 일군 김새벽은, 2019년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서 기생 출신 독립운동가 김향화로 100만 명 이상 관객에게 존재감을 알렸다. 그리고 <벌새>의 힘찬 날갯짓과 최근 촬영을 마친 설경구·이선균 주연의 <킹메이커: 선거판의 여우>라는 구름판을 통해 더 넓고 먼 땅으로 비상할 예정이다. 식물성 얼굴에 동물적 힘… 반전의 배우 조용한 왼손잡이, 마른 몸, 버터도 설탕도 넣지 않고 구워낸 담백하고 창백한 맛과 색의 식물성 크래커 같은 얼굴을 가진 그의 외양은 정적인 식물처럼 오해될 수도 있지만 정작 배우 김새벽은 사부작사부작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체력도 지구력도 좋은 동물적 모험가다. <줄탁동시>의 조선족 소녀 순희는 잔뜩 움츠러들고 의뭉스러운 데가 있긴 하지만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강한 소녀였다. <얼굴들>에서 회사를 그만두고 엄마의 낡은 식당을 개조해 새로운 식당을 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혜진은 만 개의 꿈보다 만 보의 움직임을 믿는 여성이다. 수원 지역 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끝에 서대문 감옥 여옥사 8호실에 유관순과 함께 수감된 <항거>의 김향화가 한 “만세 누가 시켜서 했습니까?”라는 말에는 훈계도 화도 없는 자존감과 강단이 느껴진다. 홍상수 감독의 <그 후>에서 출판사 직원 창숙은 불륜 관계인 사장 봉완(권해효)이 우물쭈물하는 순간에도 “우리 사랑만 하다 죽어요!”라고 외친다. <벌새>에서 그 누구도 쉽게 판단하지 않고 동정하지 않고 또 비웃지 않는 김영지 선생의 태도는 어쩐지 배우 김새벽과 많이 닮아 있다. <벌새>뿐 아니라 <한여름의 판타지아> <국경의 왕> <초행>을 봐도 김새벽이라는 배우가 가진 고유의 결을 한 올도 빼지 않고 스크린으로 옮기고 싶어 하는 감독들의 열망이 느껴진다. 감독들은 종종 김새벽에게 큰 상황만을 주고 자유롭게 대사를 부탁하기도 한다. 그것이 감독이 꼼꼼하게 미리 짜놓은 그물이건,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던져진 뜰채이건 간에 김새벽은 펄떡거리는 무언가를 포획하는 손맛을 안겨주는 배우다.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남녀의 이야기를 담은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다큐인 듯 찍은 극영화다. 이 영화에서 김새벽은 고조라는 일본 소도시에서 영화를 찍게 된 감독의 사전 취재를 돕는 여자 미정과 아마도 그 감독이 찍게 된 영화 속 주인공인 혜정을 동시에 연기한다. 실제 일본 고조에 사는 노인들을 비롯해 마을 사람들의 다양한 인터뷰가 나오는 등 과연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누가 배우인지 궁금해지는 영화다. <한여름의 판타지아>에서 “배우라는 일이 어려워요. 일이 좋아서 열심히 하면 잘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아요”라는 혜정의 고백은 배우 김새벽이 직접 쓴 대사기도 하다. 가방 안엔 아직도 ‘자신감’ 글귀가 부산에서 비디오 가게를 하셨던 부모님이 안겨준 영화라는 ‘위대한 유산’을 받은 김새벽은 연기 꿈만 가지고 무작정 서울로 왔다. “서울에서 취직했다”는 곧 들킬 거짓말을 남기고 간 그가 사실 배우가 되었다고 고백했을 때 어머니는 “네가 연기를?” 하고 놀랄 정도였다. 데뷔작 <줄탁동시>를 찍을 때는 영화 제목처럼 안에서 깨고 밖에서 쪼아주는 시기였다. ‘자신감’이라는 글자를 종이에 적어 가방에 넣고 다닐 정도로 소심한 신인 배우였던 김새벽은 아직도 그 종이를 버리지 않고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하지만 이 배우의 가방엔 그사이 손에 잡히는 큰 덩어리의 결실도 함께 채워졌다. 아침을 기다릴 필요 없는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운 새벽이다.
이 배우의 비트
잘 먹는 입
격렬하고 경건하게
영화 (맨 위)과 . 각 영화 화면 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