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그리고 내 품에 쏟아지듯 안겨서 잠시 흐느껴 울었다.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이런, 너도 나처럼 앓고 있는 거니. 하지만 금세 깨달았다. 이 슬픔은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너와 나만 느끼는 감정은 아니다. 그것을 너와 나만의 특별한 연대의식으로 생각하느니 이 세상 모두를 관통하는 슬픔 정도로만 생각해두자. 단지, 내가 너를 조금 더 닮아 그 질감을 더 가깝고 비슷하게 느낄 수 있으니 기쁘고 다행이라고 생각해보자.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도 그 느낌을 아주 잘 알아. 혼자만 겪는 일은 아니니까 안심해도 돼. 어떤 사람은 그것을 잘 감지하고 표현하는 데 능숙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어. 그런 기분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면 그 순간에 조용히 집중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러다보면 어느새 파도가 떠나는 것처럼 그 감정도 지나가버렸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그래도 우리는 맞닿아 있다 어릴 때부터 아이는 잘 웃고 자주 우울해했다. 엉뚱하고 유쾌하기도 했다. 엉엉 울기보다는 사람의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눈물을 글썽이며 자리를 떠나곤 했다. 새침하고 주변에 대한 경계가 심했지만, 한번 가까워지면 조곤조곤 말이 많았다. 생각의 가지가 무성해서 때로 자기가 골몰하는 것 외에는 무심해 보이기도 했다. 걱정을 찾아헤매는 엄마였던 나는 그걸 붙잡고 고민하기도 했다. 겉으로는 사교적이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만, 어딘가 어긋난 느낌을 감지하곤 했다. 타고난 무심함일 수도 있고 게으름일 수도 있고 지나친 자기 세계로의 몰입일 수도 있다고 해석했다.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걸 사무치게 느끼고 있을 때라 아이가 힘들어질까 미리 걱정했다. 그리고 꼬집어 설명할 수 없지만, 아이를 보니 알 수 있었다. 아빠가 나를 보며 화냈던 어느 부분도 여기에 맞닿아 있구나. 당신에게서 나는, 당신의 뿌리로부터 이어진 분리되지 않은 존재였구나. 제 존재의 연장처럼 나를 바라보고 염려하고 분노했구나. 당신은 당신보다 더 나은 나를 통해 당신을 보고 싶었구나. 당신이 아프듯 내가 아팠구나. 어떻게든 나를 바꿔서 인생을 유유히 비상하듯 살아가는 홀가분한 나를 보고 싶었구나. 거기에 당신 삶을 조금은 얹고 싶었구나.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나라는 존재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 내가 살아온 과정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 가능해졌다. 나는 아이에게 변하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네가 언젠가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내 몫은 때때로 너를 안고 함께 느껴주는 일밖에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를 아끼고 보듬고 잘 살아가고 싶어졌다. 너와 나는 다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 맞닿은 지점이 있다. 그리고 어쩌면, 너와 나는 우연히도 더 많이 맞닿은 부분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고맙게도 뒤늦게 찾아와준 네 덕택에 나를 온전히 사랑하는 법을 천천히 배우는 중이다. 잘 살아남겠다. 네가 어느 날 내게 와서 인생이 행복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고 무작정 울고 싶을 때, 괜찮다고, 하지만 무슨 느낌인지 안다고 꼭 안아줄 수 있으면 좋겠다. 엄마 아빠를 ‘인간’으로 바라볼 때 그렇다고 두려움이 온전히 가시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 떨칠 수 없는 악몽에 온몸을 뒤틀며 깨어났다. 내 곁에서 자고 있던 아이 역시 신음을 내지르며 작은 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놀라서 아이를 껴안았다. 아마도 그때 기도란 걸 한 것 같다. 제발, 제발, 나의 악몽이 아이를 찾아가지 않도록 해주세요. 내가 아는 악몽 따위는 모르게 해주세요. 결국 다시 묻고 말았다. 이 세상을, 이 삶을 관통하는 선의라는 것이 존재할까요. 이 아이의 삶을 흐르듯이 놓아주어도 되는 걸까요. 이기심 때문에 무작정 보호하고 싶은 거라고 해도, 극단의 고통에서 아이를 보호할 수 있는 기적을 주실 수는 없나요. 시간이 흘렀다. 아이는 열 살을 넘어서면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소식을 주고받는 단짝 친구가 생겼다. 지금도 여전히 가장 가깝고 마음 깊숙한 곳을 나누는 친구다. 밤마다 잊지 않고 내 볼에 입을 맞추며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이던 아이는 이제 피로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몰려오는 밤에나 내 방을 찾아 침대 속을 파고든다. 며칠 전 무슨 까닭인지 뜬눈으로 밤을 새운 아이가 방문을 열고 살금살금 걸어와 잠든 내 손을 스르르 거머쥐었다. 숨을 죽이고 눈을 감은 채 가만가만 아이의 기척을 살피었다. 잠시 뒤 새근새근 고르게 가라앉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때의 숨결을 닮은, 평온하고 깊은 잠의 기척이었다. 슬며시 눈을 떠보니 역시나 까무룩 잠들어 있었다. 아이 곁에 누워서, 다시 잠이 들지 않는 깊은 밤의 한복판에서 나의 사춘기 시절을 더듬어봤다. 잠으로 밤을 지나칠 수 없던 날들이 얼마나 잦았던가. 그 숱한 밤을 넘어 나는, 분리되는 것이 아득하기만 했던 엄마와 아빠의 세상을 조금씩 벗어났다. 비로소 엄마 아빠를 결점과 모순 또한 존재하는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들 역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며 때로는 두렵고 앞이 보이지 않아 막막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과 평생을 함께할 수 없을지도 모르리라는 깨달음과, 그들 삶에서 나는 일부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나를 오히려 자유롭게 했다. 그들의 세상에서 태어난 나는 다시, 작은 알을 깨고 부화하는 중이었다. 그 뒤로도 세상은 수차례 나와 함께 혹은 나와 상관없이 탈바꿈했다. 내가 변한 것인지, 세상이 변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때가 더 많았다. 엄마도 아빠도 그들의 속도에 맞게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는지도 몰랐다. 다 큰 어른처럼 보였던 그들 역시 성장하는 중이었다. 나의 사춘기 딸 또한 그 비밀을 깨닫고야 말았는지, 부쩍 늘어난 일상의 말다툼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반복한다. 나에 대한 서늘하고 잔인한 비판이 이어지다 감정이 서로 격앙될 때 아이는 소리친다. “엄마, 제발 좀 자라라고!” (Mom, please grow up!) 당신도 나도 자라고 있다 내가 자라라고 부르짖지 않아도 눈에 보이도록 성큼성큼 자라나는 아이에게 나는 같은 말을 하지 못한다. 성장하라는 꾸짖음은 사춘기 딸들 몫이다. 의식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머물고 정체될 것 같은 어른이라 아이는 내게 더 강조하는 걸까. 좀더 자라야 한다는 부추김을 들을 때마다 나는 아직도 자라는 중 같아 차라리 홀가분하다. 아직 덜 큰 터라 비틀거리고는 있지만, 비틀비틀 자라는 중인 걸까. 사춘기 딸들 덕분에 부쩍부쩍 자라는 날들임을 끓이는 속만큼이나 감사해야 하는 걸까. 그런 거니, 아이야? 이서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