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박미향 기자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다른 한편으로, 최근 타인의 시선과 분리돼 자기 취향을 존중받으려는 노력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일례로 3월 말에 페이스북에 개설된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거의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살 만한 세상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설립 취지를 밝히는 이 커뮤니티는 오이를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핀잔을 듣거나 오이를 빼고 음식을 주문할 수 없었던 경험을 공유한다. 또한 ‘52’(따로 읽으면 ‘오이’가 되는 숫자)가 들어간 에코백이나 버스 사진 등을 올리며 오이를 싫어하는 취향을 유희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오이를 싫어해서 겪었던 수많은 사례에 대해 상당수는 자신에게도 유사한 경험이 있음을 증언하며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음에 안도한다. 이 커뮤니티 내에서 넘쳐나는 공감은 음식 취향을 드러낼 수 없었던 사례가, 어쩌면 오이에만 국한된 게 아닐지 모른다고 추측하게 한다. 달걀노른자나 익힌 당근을 싫어하는 제2의, 제3의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생겨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건 특정 음식의 취향을 드러내는 행위에 엄청난 사회적 동력이 응집돼 있다는 점이다. 이 사회적 동력은 취향을 있는 그대로 존중받지 못하고 ‘원래 이 음식엔 OO가 들어가야 해’ ‘편식하지 마’ ‘주는 대로 먹어’ 등 일방적인 폭정에 시달렸던 개인들의 억압된 욕망에서 비롯됐음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개개인의 음식 취향을 존중하는 사회적 유연성을 측정한다면 한국 사회는 어느 정도 유연성을 가졌을까? 감히 예상하건대 결코 높은 수치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건 두 가지 특수한 이유와 한 가지 보편적 이유가 있다. 시대 취향 거스르는 음식이 되는 것 첫 번째 특수한 이유는, 한국의 음식문화와 관련 있다. 한국 식문화는 밥과 국, 찌개류와 반찬을 함께 먹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대부분의 음식을 나눠먹기 때문에 여러 명의 가족 식사를 준비할 때 모두의 식성을 전적으로 만족시키기 어렵다. 이런 상황은 외식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한식에선 반찬을 나눠먹는 것을 기본으로 고기나 찌개와 같이 주메뉴를 함께 시켜먹는다. 대부분의 주메뉴가 2인분을 기준으로 함으로써 외식의 경우에도 개개인의 음식 취향은 존중되기 힘들다. 1인분 식사를 주문하는 외국 음식을 사먹을 때도 많은 경우 한식과 마찬가지로 같이 나눠먹고는 한다. 한 식탁에 앉은 이들이 같은 음식을 함께 먹는 한식 문화가 외국 음식을 먹을 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메뉴 선택에서 사회적 위계나 다수결 원칙, 편의성과 신속성 같은 요소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한국 식문화에서 개인의 취향이 받아들여지기 힘든 배경이 된다. 두 번째 특수한 이유는, 한국 사회에 집단주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떤 문화권이든 개인주의와 집단주의가 모두 있지만, 한국 사회는 ‘나’라는 개인보다 ‘우리’라는 집단의 정체성이 더 강한 문화권으로 간주된다. 집단주의 문화의 특징은 개인의 욕구와 의견보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로 규정되는 내집단(Ingroup)의 가치와 견해가 더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데 있다. 내집단의 반대 개념인 외집단(Outgroup)은 집단주의 문화 내에서 ‘너무 다른’ 이들로 부정적 느낌을 준다. ‘한국인의 입맛에 역시 김치’라든가 ‘한국인은 (빵보다) 밥집’ 같은 언설에서도 보듯 한국 사회는 내집단의 속성을 특정한 형태로 규정해 집단의 정체성을 강화해나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문화에서 개인은 내집단의 가치를 벗어나는 음식을 선택하는 데 상당한 압박을 느끼게 된다. 마지막으로 개별적 음식 취향이 존중받지 못하는 보편적 이유는 시대적 유행에 따라 취향의 위계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소금을 들 수 있다. 소금은 많은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식재료로 한국 사회에서도 꾸준히 사용돼왔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웰빙’ 열풍이 불면서 덜 짠 소금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고 이후 소금의 위상이 점차 약해지고 있다. 입맛은 상대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주변 국가의 음식보다 ‘강(렬)한 맛’을 내세웠던 한국의 밥상에서 소금이 사라지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다. 때로 변화한 입맛의 기준에 따라 다른 문화권의 음식이 폄하되기도 한다. 너무 짜기 때문에 요즘 시대의 취향을 거스르는 ‘뒤처진 음식’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저염식, 나아가 무염식이 ‘좋은 취향’으로 받아들여짐을 볼 때, 음식에서 취향의 위계는 시대의 가치와 관념에 따라 바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취향 존중받는 미래, 취향껏 상상해본다 취향을 존중해달라는 요구는, 그것이 언어적으로 표면화되는 것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설득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이뤄지는 여러 성토와 공감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가뿐히 넘어 이들의 취향을 전혀 알지 못한 사람들에게까지 전해지는 것이 1차적 목표라면, 누구에게나 ‘오이’ 같은 존재가 있기에 상호 존중하는 자세가 중요함을 깨닫는 것이 2차적 목표가 될 수 있다. 그때야 비로소 한국 사회가 취향의 다원화와 민주화를 조금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분명 쉽지는 않겠지만, 굳이 ‘개취존중’을 언급하지 않아도 취향이 존중되는 미래가 멀지 않았음을 취향껏 상상해본다. 강보라 영상학 박사·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 *강보라의 ‘마음비추기’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필자 강보라씨와 그의 글을 사랑해주신 독자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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